김은애

초록이 무성한 계절이다. 교복을 입은 상큼한 여학생들을 볼 때마다 작년 5월에 교생실습을 했던 일이 생각나 미소가 지어진다.

말갛게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며 걱정과 설렘 속에 첫 출근을 하였다. 정문에 들어서자 화단에 곱게 핀 꽃들이 학생들의 앳된 얼굴처럼 환하고 예뻐 보였다. 동쪽 끝에 별도로 마련된 사무실 문을 열자 동료교생들이 일어나 인사를 한다. 나이가 지긋해 보여서인지 이 학교의 선생님으로 알았던 모양이다. 나도 실습교사임을 밝히고 자리에 앉았다.

지도교사의 안내로 내가 맡은 반에 들어갔는데 아이들 눈에 실망하는 빛이 역력했다. 옆 반의 젊은 선생님을 무척이나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교실 뒤쪽에 서서 참관하는 일주일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담임실습이 시작되는 첫 날이 왔다. 여전히 시큰둥한 그들에게 어렸을 적 꿈이 교사였다는 사실과 늦게 공부하게 된 사연을 솔직하게 들려주었다. 의문이 풀렸다는 듯이 웃으면서 궁금한 것을 묻는 아이도 있었다. 과정을 마치려면 여러 가지로 어려운 점이 많으니 도와달라고 부탁하였다.

진심이 통하였는지 그 날부터 학생들은 내가 하는 말들을 귀담아 듣기 시작하였다. 다른 반 학생들이 경험 할 수 없는 추억을 만들어 주리라 마음먹었다. 살아가면서 내게 지침이 되었던 좋은 이야기를 하루에 한 가지씩 해주겠다고 했더니 학생들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둘째 날은 ‘가장 싼 값으로 가장 오랫동안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책이다.’라는 몽테뉴의 말을 칠판에 크게 써 놓고 아침조회를 했다. 한 명의 학생이라도 이 말을 새겨듣고 책을 좋아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어느 한 날은 ‘책상 정리의 위력’이라는 신문기사를 인용해 정리하는 습관을 강조했다. 잘 실천하면 칭찬하는 편지를 써 주겠다고 했더니 대부분의 학생들이 손을 들고 약속하였다. 얼굴을 익혀가며 편지를 써 나갔다. 전보다 교실이 깨끗해지고 청소지도를 안 해도 스스로 잘 해 나가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였다.

누군가가 인생을 책으로 비유한 이야기가 있다. ‘제1권은 이미 지나간 과거이며 집필이 완료돼 책꽂이에 꽂혀있는 것과 같다. 제 3권은 미래라고 볼 수 있고 제2권인 현재가 중요하다. 지금 쓰고 있는 말과 행동으로 현재가 기록되고 있음을 명심하며 살자.’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었다. ‘지금’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 적었다. 이어서 시간의 중요성을 알게 하려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일화를 예로 들어 주었을 때 숙연해 하던 학생들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실습 마지막 날이었다. 약속대로 아이들 이름을 부르면서 한 번씩 안아주고 써 온 편지를 주었다. 편지를 읽은 학생들이 구석구석에서 울며 아쉬워했다.

아이들의 마음이 빼곡히 담긴 35장의 엽서를 보면서 나도 울었다. 선생님들에게 지적을 받아 툭하면 복도에서 벌을 서다가도 나와 눈이 마주치면 씨익 웃던 아이, 말썽만 부렸지만 나에게만큼은 잘 보이고 싶었다는 글에 마음이 짠했다. 정들었던 아이들과 이별의 인사를 나눈 뒤 교정을 돌아 나오는데 노을이 붉게 타고 있었다.

학생들과 진심으로 맺어졌던 특별한 인연을 생각하면 지금도 내 마음이 뜨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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