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희

이겼습니다.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후반전 10여분을 남겨 놓고 다섯 골이나 넣었습니다. 믿기지 않는 중에는 얼싸안고 경기장 주변을 도는 선수들을 보니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상황이 그려집니다. 후반전 인생의 의미가 떠올랐습니다.

전반전에 실패 했다고 포기하면 선수의 자격은 상실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최선을 다 해 싸우면서 전반전의 실수와 오류를 역전의 기회로 삼아야겠죠. 더불어 그로써만 진정한 운동의 개념을 숙지한다고 볼 때 후반전의 의미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알겠습니다.

민들레가 필 때는 눈보라가 굉장했습니다. 하필 호되게 추운 날 건물 한 귀퉁이를 찢고 나온 걸 보니 하품이 나더군요. 달포 전에는 보도블록 틈새를 비집고 나온 씀바귀 앞에서 어마지두 놀랐습니다. 동장군 앞에서 그것도 깨진 돌 틈에서 구걸이나 하듯 피었으니 얼마나 당찬 녀석인지 알겠습니다.

아무리 이삭으로 피는 게 있다지만 잎이란 잎은 바람에 날리고 만 그 때 바닥에 깔린 꽃은 뜻밖의 반전입니다. 된내기가 뿌리고 난 뒤 푸근해지기는 했어도 삭풍은 여전히 매서웠습니다. 필 자리도 시기도 아니라서 생뚱맞긴 하지만 11월을 물들일 수 있어 더 눈물겨웠습니다. 언젠가 피우려던 집념이 늦가을 말미에 선명한 꽃을 새겼다면 봄 자락에 찔러 둔 소망도 이루게 될 테니, 부화되지 못한 꿈이라도 시기를 기다릴 수 있겠지요.

늦가을의 민들레를 보는 느낌이 남다를 수 있다면 시기를 놓친 후 영그는 소망도 괜찮습니다. 늦가을에, 필 자리도 시기도 아닌 게 생뚱맞긴 하다만 그렇게라도 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셋방살이 주제에 언감생심 파고든 기세는 정말 대단했거든요. 흐드러지게 필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입니다. 무심한 발길에 수없이 꺾였을 테지만 언젠가 피우려던 집념이 늦가을 말미에 선명한 꽃을 새겼습니다.

자잘한 풀꽃들이 메시지를 전송하는 터미널 모퉁이는 유일한 사색의 공간입니다. 앞으로 어떤 꽃이 피면서 나를 불러 세울지 모르지만 팍팍한 삶에 소망을 품을 수 있기에 더욱 소중합니다.

돌 틈이든 깨진 곳이든 가리지 않는 의지라서 더 소중했습니다. 그 민들레가 봄에 어떻게 핀 상황인지는 모르겠으나 상관은 없을 테지요. 봄에 피었다 해도 늦게 다시 피는 것 또한 괜찮을 테고, 유감스럽게도 봄에 제대로 피지 못했다면 또한 다행이었죠.

사람들 왕래가 빈번한 곳이라 밟히는 동안 꽃 필 시기를 놓쳤다면 지금 이 쌀쌀한 초겨울 흐드러진 모습은 후반전에 성공한 유형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반전과 후반전 모두 성공하는 케이스라면 더 좋겠지만 후일을 기약할 수 있다는 건 더할 수 없는 소망이니까요. 내리막이 더 빠르기 때문입니다. 늙은 말이 콩 밝히고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지만 전혀 다른 건전한 가능성을 생각하면 그보다 다행스러운 일은 없겠죠.

잠재된 열정이야말로 삶의 후반에 들어서면서 열렬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인생은 후반전이라고 거침없이 말하기까지 곡절도 많았습니다.

결심은 대단 했겠지만 지나친 강조는 때로 그에 미치지 못한 약점을 드러냅니다. 크게 나이를 먹은 건 아니지만 준비를 해야 되는 게, 갑자기 닥치면 걷잡을 수가 없습니다. 시간은 촉박하고 다급해지는 그 때는 관중석에서도 야단이었죠. 역전이라 더 감격적이었다면 인생은 후반전이라는 말도 비약된 건 아닙니다. 초전에는 허송세월했어도 만회할 기회가 있다는 건 축복이니까요.

이제는 어떠한 시련도 문제 삼지 않을 자신이 생겼습니다. 방해를 하면 극복 할 것이고 가로막으면 타넘으면 되지 싶습니다. 우리 삶도 전반전에 승리한 인생과 후반전에 역전된 유형으로 나누어 봅니다.

초반부터 무난한 삶은 순풍에 돛 단 듯 별다른 장애물 없이 목표에 도달 하겠지만, 보다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거라면 모두가 포기한 상태에서 역전이 되는 그 상황이 아닐까요. 우리 삶의 타켓은 자신이라는 것과 아무 때로 자기 혁명이 수반되어야 함을 거듭 깨우칩니다. 인생은 누가 뭐래도 후반전입니다.

저작권자 © 음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