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애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봉숭아꽃물을 들인다. 밤이 되면 곱게 찧은 봉숭아를 들고 TV 앞에 앉아 손톱을 싸맨다. 이불에 묻을까 일회용 장갑을 낀 채 만세를 하고 하룻밤을 잔다.

아침에 일어나면 중요한 수술을 한 환자가 결과를 보려고 조심스럽게 붕대를 풀듯, 양말과 장갑을 하나씩 벗으며 잘 들었는지 살핀다.

여름과 가을을 지나 초겨울까지 아름답던 손톱이 마지막으로 잘려 나가면 아쉬운 마음과 또 다른 기다림이 교차되곤 한다. 올해는 어디에서 꽃잎을 따올까 고민하다가 몇 해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라 생각에 잠겼다.

두통에 시달리다가 정밀검사를 받았다. 의사는 큰 병원에 가 보라면서 소견서를 써 주었다.

첫째는 종양의심, 둘째는 뇌경색의심, 세 번째는 혈관이 뭉쳐서 그렇게 보일 수 있음.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사실은 자다가 한 쪽에 마비가 와서 감각이 없을 때도 있었고 무심코 길을 걷다가 중심을 잃고 넘어진 일도 있었다. 한 쪽 팔에 힘이 없어 운전도 할 수 없었다. 갱년기 증세까지 겹쳐 우울증이 심한데다가 소견서를 받고 거의 정신을 놓았다.

큰 병원에 예약을 해놓고 기다리는 동안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면서 식구들을 괴롭혔다. 마치 생을 마감하는 사람처럼 정리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 만나는 것도 피하고 오직 그 생각에 골몰해있었다.

혹시 수술이라도 하게 된다면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비하려고 서랍 정리를 하다가 오래 입어서 낡아진 옷을 보자 갑자기 울화가 치밀어 올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알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혀 모든 것이 억울하고 마땅치 않았다.

대형 종량제 봉투를 여러 개 사서 몇 년씩 안 입고 안 쓰던 물건들을 버렸더니 속이 시원하였다.

병원에 갈 날짜가 다가왔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쓰기 시작하였다. 남편에게 할 말이 제일 많았다.

어리숙한 나를 데리고 사느라고 고생 많았다고. 아내의 역할을 끝까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쓰려고 하는데 목이 메었다.

큰 아들에게 여러 가지를 당부했다. 갑자기 생명의 신비를 알게 해 주었던 아기 때의 웃는 얼굴이 아른거려 울음이 터져 나왔다.

둘째아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마음이 여린 그 애의 선한 미소가 떠올라 애잔한 마음이 극에 달했다. 그리고 동생들에게 또 생각나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상하게도 그런 준비를 하고나니까 갑자기 살고 싶어졌다. 운동처방도 받고 백방으로 노력해 보기로 작정한 것이다. 의사 선생님이 권고하기를 노래를 부르면 증세가 좋아진다고 해서 노래교실에도 나갔다.

그날이 와서 예약된 절차를 밟고 결과를 기다렸다. 내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의사선생님은 뭉쳐있었던 혈관이 풀린 것 같으니 걱정하지 말고 관리나 잘 하라고 하였다. 큰일을 당할 것 같이 온갖 수선을 다 떨었던 내 행동이 부끄러웠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다. 그 때 겪은 심리적인 동요로 인해 나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일까.

잠깐 동안이지만 절망과 탄식의 시간을 겪어 보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당장에 일어난다고 해도 건전하게 적응하고 극복하기가 조금은 나을 거라고 생각하였다.

손톱에 봉숭아물이 들어 있으면 마취가 안 되어 수술을 못한다는 말을 옛날에 많이 들었다. 아팠던 그 해에는 그것이 걱정되어 꽃물을 들이지 못했다. 이제는 건강해진 몸으로 연례행사를 계속해오고 있다.

봉숭아물을 들일 때마다 내 생애에 이 행사가 몇 번이나 남아있을까 헤아려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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