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애

여고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대학에 갈 수 없었다.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이 풋풋한 여대생이 되어 서울로 지방으로 떠나갔다. 언제 보게 될지 모른다면서 집 주소가 적힌 쪽지를 주고받고 함께 사진도 찍으면서 법석을 떨었다. 나는 겨울 들판에 누워있는 풀처럼 죽어지냈다. 땅속으로 녹아드는 잔설과 함께 그만 사라지고 싶었다.
그 무렵 진학에 실패해 함께 시간을 보냈던 친구가 있었다. 그 애와 매일 둑방길을 걷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국어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가 가장 즐거웠다. 선생님이 우리 학교에 처음 오셨을 때 선생님의 영향력은 정말 대단했다. 외모가 훤칠하고 멋져서가 아니었다. 본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던져 주시던 유머 한 자락에 학생들은 자지러졌다. 폭넓은 지식과 훌륭한 인품까지 느껴져서인지 선생님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어느 날 선생님이 부인자랑을 하셨다. 아내가 사랑스러워 아침마다 포옹을 하고 출근한다는 것이다. 정말이니까 구경을 와도 좋다고 하셨다. 선생님 댁 근처에 사는 몇몇 아이들이 그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고 입을 삐죽이며 떠들어댔다.
우리들의 들뜬 호기심은 이렇게 해서 가라앉았고 곧 집중할 수 있었다.
선생님이 좋으니까 공부가 즐겁고 그 시간이 기다려졌다. 국어를 통해 문학의 맛을 알게 된 나는 어느덧 관심 있는 시인의 시를 찾아 읽을 정도로 책을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처음으로 뭔가가 되고 싶다고 느끼게 된 사건이 하나 있었다.
라일락 향기가 교정에 가득한 5월의 어느 날이었다. 단발머리에 새하얀 춘추복을 입은 우리들 앞에 때 이른 반팔셔츠를 상큼하게 입고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아무 말씀도 없이 칠판에 시 한 편을 적었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님은 뭍같이 까딱없는데/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이 시의 제목이 뭔지 아는 사람?” 대부분의 학생들이  ‘파도’ 라고 대답했다. 나는 조그맣게 ‘그리움’이라고 읊조렸다. 그 소리를 들으셨는지 갑자기 큰 소리로 지금 대답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옆에 있던 짝꿍이 내 이름을 말해 주었을 때 나는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했다.
교과서에 없는 시를 알고 있다고 칭찬해 주시는 선생님의 말 한 마디에 나는 가슴이 벅찼다. 둑방길을 함께 걷던 친구와 다짐을 했다. 우리도 나중에 선생님처럼 훌륭한 국어 선생님이 되어서 다시 만나자고…
그 친구가 서울에 있는 입시학원으로 떠나던 날 뜬 눈으로 뒤척이며 밤을 보냈다. 마음을 가다듬기 어려울 때는 무작정 걷는다. 조붓한 둑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앞날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싶었다. 문득 국어 선생님이라면 내 고민을 들어주실 것 같았다. 막막하고 괴로운 심사를 편지에 낱낱이 적어 보냈다. 그리고 여러 날이 지났는데도 선생님의 답장은 오지 않았다. 어느 날 대문 틈 사이로 우체부 아저씨가 편지를 내밀었다. 그것을 가슴에 품고 방으로 들어와 숨을 죽이며 읽었다.
‘답장이 늦어 미안하다. 인격의 완성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고 믿는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하지 않니. 실망하지 말기 바란다.
꾸준히 모든 일에 성실과 애정을 쏟다보면 흔히 말하는 행복을 찾을 수 있을게다. 취직을 하더라도 쉬지 않고 노력하기 바란다. 너의 건승을 빈다.’
지난 해 국어교육 석사과정을 마쳤다. 환갑이 가까운 나이에 국어를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된 것이다. 크고 작은 성취를 맛볼 때마다 선생님의 편지를 떠올린다. 나는 아직도 존경하는 국어 선생님에게 이렇게 노력하며 살고 있다는 내 인생의 답장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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