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경님

몸 풀기를 위해 ‘국민체조 시작’의 구령을 외치며 무릎 굽히기부터 시작 한다.
옆구리운동 목운동을 하다보면 뒤죽박죽 순서는 없고 구령보다 몸이 한 박자 늦는다.
스스로 민망한 웃음이 일며 초등학교 가을운동회의 유년시절로 찾아간다.
초등학교 시절 추석이 다가오면 학교에서는 운동연습이 한창이었다.
키가 작은 나는 맨 뒷줄에서 무용연습을 했다.
양은도시락에 싸온 점심은 이미 쉬는 시간에  바닥이 났고 뙤약볕에서 교단을 바라보며 연습하는 것이 여간 곤욕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 뒤에서 회초리를 들고 서성이며 전교생을 감독하시는 체육선생님께 들키게 되면 손바닥에서 번쩍이는 아픔을 감내해야만 한다.
종료시간을 발표하는 순간까지 하나 둘의 구령에 따랐던 어느 날은 집에 오자마자 일찌감치 골아 떨어졌다.
이튿날 아침 눈 뜨기가 싫었다. 이불속에서 하루만 푹 자고 싶은 생각에 나는 잔뜩 꾀병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문구멍으로 마당을 내다보니 자르르 동백기름을 바르신 머리에 은비녀로 곱게 쪽을 찌신 할머니가 싸리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계셨다.
할머니는 이웃마을에 담배 꼬이는 일을 가기 전, 멍석을 펴고 고추며 동부 녹두 등을 널기 위에 언제나 마당을 포실하게 쓰신다.  아직 새 문풍지를 바르지 않은 방문을 열고 할머니를 불렀다.
몸배바지라는 일복을 입으신 채 싸-악 싸-악 비질을 하고 계셨던 할머니는 문지방에 엎어져 죽을 것만 같은 시늉을 하는 나를 향에 달려 오셨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거라는 호칭이 따라 붙는 손녀의 이마에 손을 얹어보신다.
헛기침을 꺽꺽 대며 목도 아프고 머리까지 아프다며 더 허풍을 떨었다.
부엌문간 풍로 위 뚝배기에서 노랗게 보골보골 끓은 푸짐한 계란찜도 외면하고 어떡하든 학교를 빼먹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 할머니가 어떤 분이신가. ‘죽어도 핵교 가서 죽는 거여, 공부는 꼴찌여도 개근상을 최고’로 치시는 할머니 손에 이끌렸다.
고개를 넘어 신작로 길로 접어들었을 때는 벌써 ‘국민체조 시작’ 이라는 확성기 소리가 들려왔다.
전 학년이 운동장에 모여 체조를 하는 모습이 떠오르자 더욱 교문으로 들어서기가 싫었다.
무엇보다 국민체조가 끝나면 환경검사를 위해 손톱과 목에 때 검사를 할 것이고 교장선생님에 이어 교감선생님의 긴 설교가 오줌 싸기 직전까지 이어 질게 뻔했다.
또한 조회가 끝나면 수업이 이어지고 도시락을 먹고 나면 지옥 같은 부채춤 등 무용 연습이 싫었다.
나의 검정고무신은 신작로 흙을 무겁게 덮어쓰고 있는데 하얀 고무신을 신은 우리할머니는 손녀의 책보자기를 움켜지신 채 사뿐사뿐 발걸음을 옮기셨다.
정문이 아닌 철조망 밑으로 기어들어 선생님께 손바닥을 맞은 그날 책상에 엎드린 나는 두 시간을 내리 자고 말았고 조퇴를 시켜주셨다.
미루나무 행렬을 지나면서 신작로 길이 그렇게 멀게 느껴지긴 처음이었다.
구판장에서 사온 쌍화탕을 마시고 식은땀을 흘리던 그 날은 정말 감기몸살이었다.
축제의  날이 다가오면 맹연습의 고달픔은 온데간데없다.
그리고 운동회 날은 푸짐한 음식냄새를 맡으며 학교로 행진한다.
우렁찬 음악이 흐르는 운동장에 들어서면 각국의 국기들이 펄럭이고 백군 청군의 점수판이 흥분을 하게 한다.
달리기를 할 때면 부모님들은 자녀와 함께 달음박질을 하고 고전무용이 시작되면 어르신들의 갈채와 덩실덩실 춤사위가 펼쳐진다.
운동장에서의 점심은 차례를 지내고 남긴 음식부터 갖은 솜씨로 차려진 대 잔치의 밥상이 펼쳐졌었다.
 국민체조를 하다보면 유년시절의 쑥수럽던 일들과 그 시절의 풍성하던 가을이 떠올라 가슴 환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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