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병학 충북도의회 교육의원

날씨가 화창한 날은 부산 태종대에서 길쭉한 두 개의 큰 섬인 대마도가 보이면 우리의 가슴을 쓸어내린다.
이 섬은 우선 지리적으로도 우리나라에서 49.5㎞ 떨어져 있고, 일본 큐슈에서는 147㎞ 떨어져 있어 일본보다 우리나라와 아주 근접한 지역이다.
 일본 정부는 우리 고유의 영토인 독도까지 자라나는 자국의 청소년들이 배우는 교과서에까지 자기나라의 영토임을 명기하여 역사를 왜곡시키는 양심도 없는 파렴치한 나라이다.
 이성을 잃은 일본의 망언, 망동에 대해 국민적 분노의 열기가 더해가고 있는 가운데 이번에 본래 대한민국 영토인 대마도를 되찾자는 범국민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약소국 설움의 비극적 운명
신라 18대 실성 이사금의 기록을 보면 우리 땅인 대마도에 일본인이 살도록 은혜를 베풀어준 댓가로 우리나라에 조공을 받쳤다.
일본은 포츠담선언시 불법으로 소유했던 우리 땅 대마도를 반환하겠다고 했다.
대마도가 '조선땅'이었다는 1400년대의 중국의 고지도가 나와 '독도와 대마도 영유권' 주장에 더욱 힘을 실어주고 있고, 1530년 조선 중종 때 만든 '팔도총도' 지도에도 대마도를 조선영토로 표기하고 '공격대상'으로 표기된 것에 더욱 힘을 싣고 있다.
얼마 전, 청주에 사는 이대성씨도 독도와 대마도가 우리 땅임을 확증하는 고지도를 세상에 내놓아 우리의 영토임을 다시 한 번 입증시키기도 했다.
 1436년 조선에 대마도를 편입시켜줄 것을 상소해 조선관직인 태수로 봉하고 지역유지들에게도 조선 관직인 만호직을 주어 조선의 땅으로 관리해왔다는 조선왕조실록 기록으로 보아 대마도가 우리 땅임을 확실한 역사적 입증이 있다.
또한 독도박물관 입구 바윗돌엔 '세종실록' 제1권에 실렸던 ‘우리나라 땅'이라는 뜻이 담긴 '대마도본시아국지지(對馬島本是我國之地)'란 글씨가 지금도 또렷이 남아 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1948년 8월 18일 '대마도 반환요구'를 전격 발표했고, 9월 9일에도 또다시 반환성명을 발표했다.
그 해 60여명의 입법의원들이 대마도를 조선영토로 복귀할 것을 대일강화조약에 넣자는 결의안까지 추진했다.
1949년 1월 7일 대한민국 국회에서 첫 연두기자 회견시 우리 땅인 대마도의 반환을 일본에게 천명했다.
국사교육 강화의 절급
그 후, 일본은 명치유신 때 천하를 통일하면서 미국, 영국 등 서유럽 강대국과 손잡은 일본의 세력이 커지면서 어수선한 국제정세 틈바구니 속에서 대마도는 1877년 일본 나가사키현에 편입되는 약소국의 설움을 갖게 되는 비극적 운명에 놓여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수년 전, 전국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도 프레스센터에서 결의문을 채택했고, 대한민국 정부도 일본에 '한국땅 대마도'의 반환을 강력히 요구하면서 부산광역시도 '대마도의 날'을 빨리 제정하라"고 주문했다.
네티즌들도 이미 일찍부터 이같은 주장을 꾸준히 펴오는 충정어린 애국심이 불타오르고 있다.
일본은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 대마도를 거점으로 중국과 우리나라를 노략질했을 때 1389년 창왕 1년에 박위가 대마도 1차 정벌을 했다.
2차 정벌은 1396년 조선 태조 5년, 3차 정벌은 1419년 세종 1년에 이종무에 의해 정벌한 후, 세종2년(1420년) 조선은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시켜 500여 년간 우리 땅으로 복속시켜온 역사적 사실이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일본 후생성은 1978년 발표한 대마도인들의 HB항원 분포도에서 한국인과 대만인도 adr형으로 100% 일치한다고까지 언급했었다.
이처럼, 대마도 사람들은 우리와 핏줄이 같아 '대마도가 한국땅'이라는 확신이 더욱 앞서고 있다.
정부는 우리 영토인 대마도를 되찾기 위한 실증적인 고증자료들을 하루 빨리 탐색해야함은 물론, 활발한 외교활동과 국사교육 강화가 절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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