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애

97세를 일기로 시어머님이 돌아가셨다.

장례식장은 천수를 누린 복 많은 어른이 가셨다고 차분한 분위기였다. 어머님을 좋아했던 나도 큰 슬픔 없이 일을 치렀다.

그런데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흐를수록 어머님 생각으로 가슴이 아프다. 돌아가신 다음에 후회하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꽤나 노력했었다.

아이들 어릴 때는 자주 찾아뵙고 며칠씩 자고 오기도 했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할머니와 함께 한 추억이 많다. 어느 가을날이었다.

두 아들이 한창 개구쟁이 짓을 할 때 시댁에서 있었던 일이다. 바깥마당에는 코스모스가 하늘거리고 안마당에는 고추잠자리가 맴 돌고 있었다.

잠자리채를 가지고 놀던 두 녀석이 갑자기 대청마루로 올라가 칼싸움을 하였다. 창호지 문을 찢게 될까봐 조마조마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건너방 문에 구멍을 뚫어놓았다.

호되게 야단을 쳤다. 하얗고 팽팽한 새 문이라 어른들에게 여간 눈치가 보이는 게 아니었다. 어머니는 크게 웃으면서 “어이 잘한다! 어이 잘해! 더 뚫어라! 더 뚫어... 실컷 놀게 내버려둬라.

문이야 새로 바르면 되지만 애들 크는 건 잠깐이다.

나중에 봐라. 하라고 해도 안할 때가 있을 테니...”

그날 밤 담요로 찬바람을 막고 자면서 커가는 아이들에게 나도 어머니처럼 너그럽게 대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렇게 말썽부리던 두 아들이 커서 할머니를 뵐 때마다 안아 드렸다. 할머니가 자꾸 작아지신다고 안타까워하면서. 지금은 김장철이다.

어머니가 안 계신 줄 알면서도 전화를 기다리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추수가 끝나는 11월 초순쯤이면 꼭 전화를 하셨다. 뭘 주고자 하실 때만 오라고 하셨던 분이다.

차가 휘청하도록 채소와 곡식을 싣고 와서 그것으로 마냥 먹고 살았다.

자식들에게 간섭 안 하고 베풀기만 하셨던 분, 어려울 때 넌지시 도와주었을 뿐 생색내지 않고 그윽하게 바라만 보셨던 분, 이런 어머니를 실망시켜 드렸던 일이 후회가 된다.

두 아들이 각자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다.

우리 내외는 신이 나서 주말에 더 바쁘게 살았다.

시골에 가는 일이 뜸해졌고 가더라도 하룻밤 자고 오는 일이 별로 없었다.

서운해 하시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지만 우리는 아들과 함께 보내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 그곳에 잠시만 머물렀다 오곤 하였다.

우리 식구 모두 어쩌다 하룻밤 잘 때도 마찬가지였다.

T.V를 보고 있는 우리들의 뒷모습을 어머니는 쓸쓸하게 바라보시다가 베개를 들고 건너 방으로 들어가 주무셨다.

나만이라도 어머니와 눈 맞추고 무슨 이야기든지 나누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낙엽이지고 찬바람이 불 때마다 하셨던 말씀이 생각난다.

“왜 이렇게 오래 사는지 모르겠다. 이제 그만 땅속에 들어가서 가만히 드러누워 있었으문 좋것어.”

시댁 바로 뒷산이 어머니의 집이다.

양지 바른 곳이라 떼가 잘 살아나 묘 둥지가 어머니 마음처럼 둥글고 예쁘다.

그곳에 가면 어머니가 내게 말을 걸어오신다.

“얘, 김장은 어떻게 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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