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숙

지금은 어디 있을까?좋은 곳에 태어났을까? 윤회에서 벗어나라고 기도했는데, 말 못하는 짐승의 몸 받지 말라고 법당 안에까지 데려가서 삼배까지 시켰었는데,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와 있을지 가끔 소식이 궁금하다.
지금도 선한 눈망울이 생각날 때면 눈물짓는 이 마음을 알고 있으려나? 뽀야는 9년 전 스물세 살 된 딸의 생일기념으로 사준 푸들이다. 사달라고 할 때는 혼자 다 할 것 같더니 바쁘다고 결국 내 차지다.
털이 보송보송한 녀석은 만나자마자 먹는 것을 밝히는 먹보였다.
아무것이나 먹으려고 하는 녀석에게 난 절제하는 법을 가르치고 잘 받아먹는 녀석이 귀엽다면서 딸과 아들은 나 몰래 주곤 했다. 덕분에 몸집이 커지면서 얼마나 부지런한지 가만두는 것이 없다. 닥치는 대로 먹어보고 토하고 그러면서도 다시 먹는 먹보. 그래도 애교가 많아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그런 녀석이었다. 서울서 울산까지 버스를 타고 다녀도 끽소리도 안 하고 절대 대소변도 차 안에선 안 본다. 5시간이나 걸려 울산에 도착하면 문 열기가 무섭게 화장실을 찾아 들어간다.
얼마나 급했는지 뒤도 안 보고 뛰어들어가는 모습도 왜 그리 예쁜지? 혼자 한바탕 웃었다. 나오는 녀석을 번쩍 안아 주었다.
그렇게 8년을 반려동물로 함께했다. 여행을 좋아하는 나를 따라 배를 타고 섬으로도 가고, 기차를 타고 정선 아우라지까지 다녀왔다. 내가 가는 곳엔 늘 그 녀석이 함께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나를 따라 구리로 갔었다.
친구가 왔는데 한밤중에 돌아가야 한다고 해서 데려다 주고 오는 길이었다. 1시경 구리에서 출발해서 호법 분기점에 들어섰다. 무릎 위에서 뽀야는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자동차경주 하듯 달리던 나는 이제 천천히 다녀야지 하고 주행선으로 들어서 3분 정도 달렸을까? 송아지만 한 고라니가 펄쩍 뛰어오르는 것을 본 순간! 차 밑으로 고라니가 들어가며 지르는 비명이 들렸다. 두 손으로 핸들을 꽉 잡고 낭떠러지로 나가는 차를 겨우 돌렸다. 중앙 분리대로 방향을 바꾼 차는 더는 핸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
충돌이라고 생각한 순간 부처님! 하고 외마디를 외쳤다. 그 밤에 집에 돌아가는 친구가 미안해할 모습이 떠올랐다. 남편의 놀란 얼굴도 보인다. 그 짧은 순간 그 많은 생각이 어디서 왔을까? 차는 중앙 분리대에 닿더니 곧바로 전복되고 만다. 뒤집힌 채로 뽀야를 불렀다. 그런데 보이질 않았다.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안전띠를 풀고 이리저리 불러도 보이질 않았다. 차에서 빠져나와 목이 터지라 불러도 기척이 없었다. 차에 깔렸나 하고 몸을 거꾸로 하고 뒤져봤다.
지나가는 운전자들이 위험하니 밖으로 나오라 했다. 정신을 차리고 밖에 나와서도 그 녀석을 애타게 찾아봤다.
사라진 자취조차 보이질 않는 녀석을 부르며 우는데 가슴엔 뜨거운 눈물이 흐르건만 눈에서 눈물이 마른다. 그렇게 그 녀석은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서리가 무섭게 내리던 날 떠난 그 녀석을 찾으러 다녔다. 전단도 붙이고 사고 현장 부근 파출소에 신고도 했었다. 다섯 번이나 그 부근을 찾아다녔으나, 그 녀석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이후 난 3, 4개월을 울며 지냈다.
집에 오면 품에 뛰어오르던 그 녀석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고 나갈 땐 잘 다녀올 테니 집 잘 보라고 말하는 나를 발견했다. 자러 갈 때마다 자러 가자고 혼잣말을 했다.
잊기 위해 마신 술로 눈이 퉁퉁 붓게 울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뽀야하고 비슷한 크기의 유기견이 우리 집에 찾아들었다. 그릇 하나 밖에 두고 사료도 주고 때때로 간식도 줬다.
조금만 기척에도 놀라 도망가는 녀석이 원망스러웠다. 떨어지지 않게 사료를 주고는 유리창 너머로 먹는 모습만 봤다.
겨우내 그 녀석은 그렇게 나하고 숨바꼭질하듯 다녀갔다.
어디서 자는지 꾀죄죄한 모습에 가슴이 아파 씻어주고 싶었지만, 곁을 주지를 않았다. 그렇게 오던 녀석이 어느 날부터인가 보이질 않았다.
좋은 곳으로 떠났나 보다. 함께 친구 하며 오던 친구들도 보이질 않았다.
작지만 그 녀석이 리더였나 보다. 서운함이 있었다.?예쁘다고 키우다 어렵다고 길에다 버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미물일지라도 생명을 부여받았는데 좋다고?할 땐 언제고 그렇게?매몰차게 버리는지? 생명의 존엄함을 모르는 사람들은 반려동물을 키울 자격이 없다고 생각된다.
아니 인간의 존엄성마저도 모르는 사람들이란 생각이다. 더 좋은 곳에 가라고 기도해 보았다.1년도 더 지났다. 이제 그 녀석을 놓아준다. 그때 내 차와 함께 유명을 달리한 고라니와 사라진 뽀야를 위해 아침마다 왕생극락하기를 기도했다.
지금도 사고 현장을 지나칠 때면 그 녀석이 생각난다. 말 못하는 짐승이라 치부하기엔 너무 정이 많이 든 자식 같은 반려동물.
강아지를 예뻐하는 걸 알고 지인들은 또 키우라고 하지만, 이제 키우고 싶지 않다. 헤어짐의 아픔을 더는 갖지 않기 위해 그냥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대신한다. 좋은 곳에 다시 환생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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