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이면 농민회장 박종태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
나쁜 것과 좋지 않은 것
선한 것과 악한 것

인간들이 세상사를 살아가면서 세상 속에 선을 그어 놓은 이치들이다.
이둘 간에 충돌이 인간사이고 세상사가 되었다.
인간들은 자기가 하고 있고 처해있는 상황에 옳음이라는 동기부여를 전제하고 생활 속에 사회발전을 모색하고 있다.
이 상황은 현재의 사회를 받쳐주는 옳음이라는, 또는 좋은 것이라는 전제하에 옳지 않음이라든가 좋지 않음을 부정하는 속에 가능한 것이다. 옳지 않음을 전제로 하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하면, 현재 우리가 옳음이라는 전제 속에 사회는 어디에서 정당성을 부여받는가??
많은 인간 다수의 염두에 의해서?
인간사고 속에 깊이 자리매김한 큰 종교에 의해서?
또는 현재를 지배하는 권력상층부의 심장 속에서?
아니면 시대를 앞선 선각적인 철학자들의 염두에서?
과연 누가 이 사회가 옳음이라고 정의한 현재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

옳다는 것 선함 선한 것, 이 모든 것은 정당성을 부여받기 이전 옳지 않은 것·악함·나쁜 것 이것이 있어야 가능하지 않나? 이 상대가 존재하지 않으면 어떻게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구별할 수 있나?
선함만이 이 사회 속에 존재해야 하고 이 모양이 인간사가 지향해야 할 사회적 목적이라면 선함이라는 동기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상대가 없는 실체는 선·악·우열을 가릴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은 현재의 자기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옳음이라는 테 속에 있는 무리들의 일방적인 외침이 아닐까?


생각을 같이하는 무리가 생각이 같지 않은 무리를 따돌리기 위한 수단이 편 가르기인 것이다. 선하지 않은 것은 선한 것에 비해 전혀 정당성이 없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선함만 존재했다면 시시비비를 가릴 이유도 서로 간에 정당성을 논할 이유가 성립되지 않으니 말이다.
나와 사고가 다른 무리들은 선하지 않다거나 나쁘다거나 옳지 않다고 선을 긋는 작금의 세태는 실로 아름다운 세상사는 아니다.
나와 사고가 다른 집단을 매도 하거나 나쁘다고, 옳지 않은 집단으로 몰아가매 나에 무리가 정당성을 부여받으려는 작금의 세태는 어울리고 더불어 사는 인간사는 아닌 것이다.
인간 개인 개인의 사고가 보석보다 아름다운 이유는 이 사고가 사회발전의 요추이자 각자 침해받을 수 없는 하늘로부터 받은 고유의 인격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세상사 나는 어느 무리에 속해 있는가 나는 어느 쪽 사회 구성원인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같은 사고를 하지 않는다고 옳지 않은 무리 속에 밀려나 있지는 않은가!
사고의 진정한 자유로움이야말로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누려야 할 원초적 행복이 아닌가?
이 원초적 행복조차도 작금의 세태 속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나의 무리와 같은 사고 같은 꿈을 꾸지 않는다면 말이다. 같은 계급, 같은 무늬만이 아종으로 대접하려는 지배계급의 특권의식과 그 호사를 누리고자 끊임없이 무늬만 다른 아류의 집단을 생산해야 하는 사회구조가 어떻게 옳음과 그름의 정당성을 논할 수 있을까.

나와 다른 무늬, 다른 사고를 하는 자. 적어도 동조하지 않는 부류는 모두 옳지 않음 속에 가두어 놓고 보는 것이 현재 사회다. 아와 다른 사고 다른 꿈을 꾸어도 그름이라고 섣불리 매도하지 않는 사회, 다른 사고와 꿈도 또 다른 희망 속에 섞여 아름다움으로 승화되는 사회는 꿈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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