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문 음성군 청소년상당복지센터장 (품바축제 기획위원)

 
 

품바축제가 오는 5월23일부터 26일까지 나흘간 음성에서 개최된다.
음성에서 품바축제를 개최하게 된 것은 오늘날 오웅진 신부로 하여금 꽃동네를 설립하는데 있어 단초를 마련한 최귀동 할아버지의 거지생활로서의 숭고함을 본받고자 하는 취지에서 마련됐다.
품바를 현대적 의미로 해석하면 품바는 “사랑을 베푼자만이 희망을 가질수 있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매년 음성에서 개최하는 품바축제는 외형적으로 단순한 놀거리의 축제처럼 비춰질수 있지만, 내면적으로는 인간적인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 축제이기도 하다.
그런 관계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최귀동 할아버지의 삶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필자가 최귀동 할아버지와 동시대의 삶을 살았던 이들의 증언을 듣고자 금왕읍 일대를 누빈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신선하다.
왜냐하면 새로운 만남에서 체득할수 있는 호기심이 있기 때문이다.
호기심은 새로움을 발견하게 되고 일상생활에서 느낄수 없는 삶의 참의미를 깨닫게 한다. 최귀동 할아버지의 삶의 궤적을 찾아 동시대 삶을 살아오면서 함께 했던 이들을 찾아 증언을 듣는 것은 유사한 내용으로 일관되지만, 일관될수 있다는 부분에 감회가 새롭다. 최귀동 할아버지가 동냥을 하면서 동네 사람들에게 민폐로 작용되거나 행패나 부리는 거지로 통용되었다면 그냥 천박한 거지로 낙인찍혔을 것이다. 지난 2000년 최귀동 할아버지에 대한 증언 인터뷰를 한 후 1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최귀동 할아버지에 대해 증언을 해주는 이들 대부분이 그 당시의 최귀동 할아버지와의 인연을 인간적인 만남의 장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새삼 놀라왔다.
대부분 거지가 집에 찾아오면 귀찮고 어떡하면 쫓아보낼까를 궁리했지만 대부분 인터뷰에 응해주신 동시대의 금왕읍민들에게 있어서 최귀동 할아버지는 “착한 거지”로 통용되었다.
10년전 인터뷰에 응해주셨던 분들 중에는 고령으로 인해 돌아가신 분들도 있고,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신분도 계시고, 지병으로 바깥 출입을 하지 못하는 분도 있다.
최귀동 할아버지의 생애의 흔적을 찾아 기록으로 남기려는 것은 세월이 흐르면 최귀동 할아버지가 실천으로 행동해주셨던 박애의 삶이 신화적인 측면으로 누군가가 꾸며낸 이야기로 평가절하될 우려도 있고, 의도적인 성인화가 아니냐는 의혹의 눈길을 정확히 하자는 취지에서이다.
그러한 관계로 최귀동 할아버지의 삶을 곁에서 지켜본 주민들,그리고 밥을 나누었던 사람들의 증언록을 남김으로써 역사적 사실과 그분의 삶의 박애정신을 뚜렷하게 재조명하고자 하였다. 최귀동 할아버지는 귀한 집의 아들로 태어나 행복하게 살다가 역사의 수레바퀴에 눌려 굴곡의 삶을 살아야 했다. 일제의 강점기는 자신도 밥을 얻어먹고 살아가야하는 현실을 어쩔수없이 받아들이도록 했다.
하지만  최귀동 할아버지에 있어 현실은 병든 몸을 이끌고 동냥을 통해서 연명해야 하는 운명의 기로에 서서 가장 인간적인 이타주의를 발휘하게 했다.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이들을 무극천 다리 밑으로 데려와 자신도 거지이면서 동냥으로 이들을 먹여 살리고자 안간힘을 기울여 나가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은 어디서 왔을까?
어린 아이들이 놀다가 다칠까봐 동네 공터에 버려진 유리조각과 사금파리조각 못조각 등을 주워다 버리는 마음 씀씀이는 어디서 왔을까?
비록 거지라는 사회빈민층의 나락으로 떨어져도 좌절하여 생을 마감하려 하지 않고 동냥을 통해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행려병자들을 돌보는 마음가짐은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실천으로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 평가받는 것은 그사람의 지위나 계급이나 사회적 신분이 아니라 그 사람이 행한 행위에 있다는 것을 최귀동 할아버지는 실천으로 보여주고 있다.품바축제가 오는 5월23일부터 26일까지 나흘간 음성에서 개최된다.
음성에서 품바축제를 개최하게 된 것은 오늘날 오웅진 신부로 하여금 꽃동네를 설립하는데 있어 단초를 마련한 최귀동 할아버지의 거지생활로서의 숭고함을 본받고자 하는 취지에서 마련됐다.
품바를 현대적 의미로 해석하면 품바는 “사랑을 베푼자만이 희망을 가질수 있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매년 음성에서 개최하는 품바축제는 외형적으로 단순한 놀거리의 축제처럼 비춰질수 있지만, 내면적으로는 인간적인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 축제이기도 하다.
그런 관계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최귀동 할아버지의 삶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필자가 최귀동 할아버지와 동시대의 삶을 살았던 이들의 증언을 듣고자 금왕읍 일대를 누빈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신선하다.
왜냐하면 새로운 만남에서 체득할수 있는 호기심이 있기 때문이다.
호기심은 새로움을 발견하게 되고 일상생활에서 느낄수 없는 삶의 참의미를 깨닫게 한다. 최귀동 할아버지의 삶의 궤적을 찾아 동시대 삶을 살아오면서 함께 했던 이들을 찾아 증언을 듣는 것은 유사한 내용으로 일관되지만, 일관될수 있다는 부분에 감회가 새롭다. 최귀동 할아버지가 동냥을 하면서 동네 사람들에게 민폐로 작용되거나 행패나 부리는 거지로 통용되었다면 그냥 천박한 거지로 낙인찍혔을 것이다. 지난 2000년 최귀동 할아버지에 대한 증언 인터뷰를 한 후 1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최귀동 할아버지에 대해 증언을 해주는 이들 대부분이 그 당시의 최귀동 할아버지와의 인연을 인간적인 만남의 장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새삼 놀라왔다.
대부분 거지가 집에 찾아오면 귀찮고 어떡하면 쫓아보낼까를 궁리했지만 대부분 인터뷰에 응해주신 동시대의 금왕읍민들에게 있어서 최귀동 할아버지는 “착한 거지”로 통용되었다.
10년전 인터뷰에 응해주셨던 분들 중에는 고령으로 인해 돌아가신 분들도 있고,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신분도 계시고, 지병으로 바깥 출입을 하지 못하는 분도 있다.
최귀동 할아버지의 생애의 흔적을 찾아 기록으로 남기려는 것은 세월이 흐르면 최귀동 할아버지가 실천으로 행동해주셨던 박애의 삶이 신화적인 측면으로 누군가가 꾸며낸 이야기로 평가절하될 우려도 있고, 의도적인 성인화가 아니냐는 의혹의 눈길을 정확히 하자는 취지에서이다.
그러한 관계로 최귀동 할아버지의 삶을 곁에서 지켜본 주민들,그리고 밥을 나누었던 사람들의 증언록을 남김으로써 역사적 사실과 그분의 삶의 박애정신을 뚜렷하게 재조명하고자 하였다. 최귀동 할아버지는 귀한 집의 아들로 태어나 행복하게 살다가 역사의 수레바퀴에 눌려 굴곡의 삶을 살아야 했다. 일제의 강점기는 자신도 밥을 얻어먹고 살아가야하는 현실을 어쩔수없이 받아들이도록 했다.
하지만  최귀동 할아버지에 있어 현실은 병든 몸을 이끌고 동냥을 통해서 연명해야 하는 운명의 기로에 서서 가장 인간적인 이타주의를 발휘하게 했다.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이들을 무극천 다리 밑으로 데려와 자신도 거지이면서 동냥으로 이들을 먹여 살리고자 안간힘을 기울여 나가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은 어디서 왔을까?
어린 아이들이 놀다가 다칠까봐 동네 공터에 버려진 유리조각과 사금파리조각 못조각 등을 주워다 버리는 마음 씀씀이는 어디서 왔을까?
비록 거지라는 사회빈민층의 나락으로 떨어져도 좌절하여 생을 마감하려 하지 않고 동냥을 통해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행려병자들을 돌보는 마음가짐은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실천으로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 평가받는 것은 그사람의 지위나 계급이나 사회적 신분이 아니라 그 사람이 행한 행위에 있다는 것을 최귀동 할아버지는 실천으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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