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송우

초등학교 4-5학년이 되던 때 그 시절엔 왜 모든걸 보면 보는 대로, 닥치는 대로 다 해보고 싶었는지…. 친구들과 팽이치기, 제기차기, 배구, 축구, 탁구, 달리기, 호박에 말뚝박기, 방죽에서 나무에 올라 다이빙가 수영하기, 닭 서리하기, 과일 따먹기등 남이 내놔라 하는 짓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몽땅 다해 봤는데….
우리 집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나 매우 부지런한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성장했으며 아침 5시에 일어나 담배밭에 가서 2시간 정도 담뱃순을 치고 집으로 돌아와 부랴부랴 세수하고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허겁지겁 가방을 둘러메고 아리랑 동동 학교로….
읍내에 있는 중학교까지 걷다 뛰다 반복하여 겨우 시간 내에 학교에 도달하면 피곤하고 졸려 에이 모르겠다. 잠이들고…. 그날 학교 수업이 끝나면 곧장 집으로 달려와 소 꼴을 한 짐 배야 그날 저녁을 안심하고 먹을 수가 있지, 그렇지 않으면 집에도 들어갈 수가 없는 궁지에 몰려 더욱 고된 생활이 이어져만 가는데. 왜냐고? 저희 제일 큰형님께서 동생들을 호랑이 무섭게 다스렸거든요.
하루 왕복 12Km 하당에서 음성읍 읍내리에 있는 한일중학교까지 걷다 뛰다 허기가 지어 둥그런 산모퉁이에서 잠시 눈을 붙이는 둥마는 둥. 왜 그 시절이 나에겐 엄청난 고통을 안겨줬는지 돈이 업어 산기슭에 올라 칡을 걷어 잎을 떼고 8자로 엮어 칡 장수한테 지게로 한 지게 내다 팔면 그때 돈으로 200~300원을 받아 용돈을 마련하곤 했다.
지금도 그 시절이 정말로 잊혀지지가 않고 생생하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청주농고를 진학하여 고등학교 3학년 1학기인 7월30일자 공무원에 최종합격하여 이듬 해 졸업 후 1977년 9월 1일 5급 을류로 첫발령 근무지로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사무소 산업계에서 근무하게 됐는데 첫 발령지에서 고등학교 동기생인 친구와 같은 적은 봉급으로 하숙을 시작 봉급의 60%가 하숙비로 나가고 그달 용돈을 쓸 수가 없는 그런 생활 속엣서 첫 근무지에서 2~3개월 동안은 그런저런 대로 시간이 어떻게 빠른지 매우 바쁜 일과를 소화해 갔다.
그러던 그 이듬해가 되니 벼 나락 담그는 시기가 도래되어 정부에서는 통일벼 권장에 엄청난 독려를 하고 있는데 농민들은 농가에서 준비해 둔 일명 추정벼(아끼바리)를 심을려고 나락을 담그고 있지 않은가….
글자 그대로 야단법석 큰일이 난 것이다.
추청벼를 심는다고? 그건 절대로 안 된다며 면 직원들이 조를 편성하여 나락물을 버리고 추청벼 볍씨를 햇볕에 말리는 등 주민설득을 거듭했는데 농가에서는 면 직원들이 왔다. 가면 다시 추청벼를 물에 담그기가 일쑤였다.
그런 일 외에도 수없이 많았으나 여기서 줄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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