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포대의 모래 방석에 앉아 넓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모처럼 바깥바람을 쐬며 쌓였던 스트레스를 한꺼번에 토해내듯 바다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는 사람들, 그들의 목소리가 바람과 함께 멀리 퍼져 나간다.
나는 남편의 회사 직원들의 야유회에 하루를 같이하고 있다. 생산현장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 주로 삼십대에서 오십세를 넘긴 여성근로자들이다.
나라 경제에 한몫을 하는 그분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 보이지 않는 힘이 내게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거센 파도의 포말을 바라보며 바닷바람에 얼굴을 씻는다.
모래 위에 새긴 글씨가 파도에 힘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이 세상의 욕심과 허황된 욕망을 깨끗이 지워버렸으면 했다.
주문진 해안가에서 있었던 몇 시간 전의 일들이 수평선 너머에서 얼굴을 내밀듯 물위로 떠올랐다.
우리 여행객을 실은 관광버스는 주문진의 상가 앞에서 주차를 하기 위해 머뭇거리고 있었다.
뒤이어 방송된 버스기사의 안내 방송은 “주차할 공간이 마련되지 않아 ○○상점 앞에서 주차를 시킬 수밖에 없으니 그 상점의 물건을 많이 팔아 주십시오.”라는 방송이었다.
우리는 차에서 내렸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나란히 자리한 두 상점 사이에서 여자들의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타고 온 차를 서로 유치하기 위해 시작된 싸움인 것 같았다. 처음에는 말다툼으로 시작되는가 싶더니 급기야 머리채를 당기고 발로 차면서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두 여자는 생의 끝자락에서 목숨을 건 사람들처럼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 치열한 삶의 현장 그 자체였다.
나는 가슴이 떨려 누군가 말려주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순식간에 구경꾼들만 몰려들었다. 나는 그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점심식사 후 해안가를 한바퀴 돌고 버스가 있는 곳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또 다른 한사람과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조금전보다 더 격렬하게 몸을 부대끼며 엉키어 있었다. 옷이 찢어지고 얼굴이 벌겋게 된 여자들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처음엔 무서움에 떨었는데 그들이 정말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님들이 가게 안으로 모여들자 싸움은 끝이 났다.
그들의 용기와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고 찢어진 옷을 갈아입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손님을 대하는 그들을 바라보며 손이 아프도록 박수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만약 내가 그들의 입장이라면 나는 어떤 행동을 보였을까.나는 아마도 몸으로 부딪치기 전에 주저앉아 울고 있을 것이 뻔했다.
나는 어떤 책임감이나 의무감 같은 것이 몰아쳐 왔다. 그래서 예상보다 많은 물건을 살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아직도 모래 방석에서 일어설줄 모르고 있다.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의 손엔 미역과 다시마가 들려 있다. 천진하게 웃는 모습이 소박해 보인다.
하루종일 기계 앞에서 기름냄새를 맡으며 자리를 지켰던 사람들의 오늘 하루가 생활의 활력이 되어 주었으면 바랬다.
그리고 여름의 덥고 지루한 시간을 동해바다의 시원한 바람을 생각하며 보람 밭을 일구어 나가길 바라고 싶다.
나는 허공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바다는 배경이 되어주고 머리들 다독이고 옷매무새를 고치며 다정하게 웃고있는 주문진 해안가의 억척아줌마가 주인공이다.
허공의 그림을 바람이 지워버린 것처럼 그들의 가슴에 상처가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 그들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모습이 아닐런지....
요즘 유행어 중에는 ‘아나기’라는 말이 있다. 해석하자면 ‘아줌마는 나라의 기둥’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우리 주부들의 위신을 세워주는 말인 것 같아 어깨가 으쓱해진다.
<가섭산의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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