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렬 전 음성교육장 칼럼

 
 

일본 왕궁의 최고 요리사가 시골집에 와서 부모님이 해 주는 음식을 먹고는 항상 맛있게 잘 먹었다고 말하자 그 어머니가 물었다.“너는 세계 각국의 요리를 모두 만들어 왕의 식탁에 올리는데, 내가 만들어 준 음식을 먹고 맛있다고 하느냐?”

그 아들이 대답하기를 “나는 음식을 의무감으로 만들어 왕의 식탁에 올리니 맛이 없지만, 어머니는 사랑의 마음으로 정성을 들여 음식을 만들어 주시니 맛이 있다”고 말했다.

누에는 뽕잎을 먹고 자라지만 아이들은 부모의?사랑을?먹고 자란다. 부모와 교사는 작은?사진기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매일 사진이 찍혀 가고 있다.

엄마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자라는 아이들은 마음도 곱게 자랄 것이다. 그러나 부모의 사랑과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아이들은 어딘가 모르게 티가 나게 마련이다. 부모의 따스한 손길은 고기반찬 보다 더 소중한 것이다. 바쁜 일과 속에서 한 번 더 마음을 쓰고 사랑을 주면 아이들은 정성을 쏟은 만큼 자란다.

젖먹이가 칭얼거리면 그냥 젖을 물릴 때와 젖을 물리면서 여기저기 쓰다듬어줄 때와 젖을 물리면서 쓰다듬어 주다가 자장가나 이야기를 들려줄 때와는 확실히 차이가 있다고 한다.

업고 안고 젖을 먹고 자란 아이가 똑똑하다고 한다. 아마도 이유는 그 어떤 아이보다도 더 많은 사랑을 느끼며 자랐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릴 때는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많이 느낄 수 있을 만큼 사랑을 듬뿍 주어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이 밝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고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받은 만큼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 게 될 것이다.

부모는 아이에게 사랑이라는 자원을 주어야 한다. 기름진 땅에서 채소나 곡식이 건강하게 자라듯이 부모의 마음 밭 환경이 어떤가에 따라 아이들의 정서 상태가 달라진다. 부모 마음의 텃밭이 건강하지 않다면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건강하게 자라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육체적인 배고픔보다 정서적인 배고픔을 채워주는 것이 최고의 영양식이며 보약이라고 생각한다.

“부모의 사랑은 아이들이 더우면 걷어차고, 필요할 때는 언제나 끌어당겨 덮을 수 있는 이불 같은 것이어야 한다.” 이미 고인이 된 작가 박완서 선생의 고언이다.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보면 나무는 아이에게 놀이터나 휴식처가 된다. 아이가 크면 나무는 과일을 준다. 또 나중엔 집이나 배를 만들 목재를 준다. 모두 잘려나간 뒤 소박한 그루터기가 되어 힘없는 늙은이에게 멋진 쉼터가 된다. 이렇게 나무는 우리의 ‘부모님’처럼 아무 조건 없이 평생 모든 걸 내준다.

부모란 아이들의 성장과정에서 든든한 우군이요, 동행자가 되어주는 역할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실수를 하고 어리석은 짓을 하더라도 항상 같은 자리에서 조용하게 지켜보며 모든 것을 내어주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이들이 나이를 먹어가도, 어머니의 음식은 항상 같은 맛이고, 아버지의 손은 항상 따뜻해야 한다. 그 손이 아이들을 끌어주고 때로는 어깨를 다독거리며 모진 세상에 위안이 되고 용기와 힘이 된다.

아이들은 유명하고 유력한 부모 보다는 평생을 따뜻한 부모일 수 있기를 원한다. 걷어차도 결코 떠나지 않는 이불 같은 존재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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