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향심과 거듭 발전하는 음성군민 정기로 승화해야.....

3.1절을 맞아 소이면 한내장터에서 만세를 부르고 있는 주민들.
3.1절을 맞아 소이면 한내장터에서 만세를 부르고 있는 주민들.

‘뜬 구름, 부는 바람, 흐르는 강물도 이곳에 멈추어 묵상할진저. 눈감으면 들려오는 그날의 함성, 펄럭이는 태극기, 절규하는 만세소리여....’ -대소면사무소 앞, 기미년3.1독립만세추념비 서문 중-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해서, 우리나라 방방곡곡에서는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잃어버린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전개됐었다. 이는 세계 역사에도 유례가 없는 숭고한 평화적 독립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벌써 95년이 흘렀다.

특히 우리 음성군 관내에서 전개됐던 3.1운동은 충북도에서도 가장 격렬하게 펼쳐졌다.

창간 19주년을 맞은 본보는 3.1독립정신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음성 관내에서 일어났던 3.1만세운동에 대해 소개하려고 한다. --편집자 주--

 

◈ 3.1독립만세운동

우리 민족은 1910년 일본에게 완전히 국권을 침탈당해 일본제국주의의 통치 아래 들어갔다. 이후 국내.외에서는 애국자들과 민족 지도자들이 대규모 독립운동을 일으킬 기회를 노렸다. 이때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됐고,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에서 승전국인 미국대통령 윌슨은 패전국의 식민지 처리에 대한 민족자결원칙을 선포했다.

이에 일본에 유학하는 한국인 학생 조직체인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은 1919년 2월 8일, 동경에서 400여 남녀 유학생과 함께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했다.

국내에서는 2·8독립선언에 자극받아 민족대표 33인이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종로의 파고다공원에서 낭독하고 독립만세시위를 펼쳤다.

이 만세운동은 같은 날 평양 등 여러 곳에서 거의 동시에 일어났으며, 이후 해외까지 확산되며 한국인이 사는 곳은 어디서나 3·1운동에 호응하여 독립선언과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부터 5월말까지 3개월간 50명 이상의 독립만세시위 집회수가 1,542회, 참가 인원수는 202만3,098 명에 달했다. 그러나 이것은 50명 이상 규모의 집회와 참가자수만을 조사한 것이기 때문에 저평가된 자료. 이 외에 농어촌에서의 무수한 소규모집회까지 포함하면 3·1운동 실제 참가자수는 이보다 훨씬 많았다.

3·1운동은 비폭력.평화적 만세시위운동으로 전개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일제는 헌병과 경찰, 육.해군 정규군까지 동원해 시위 군중에게 총탄을 쏘아 살육하고, 민가·교회·학교 등 시설에 불을 지르는 만행을 자행했다. 3·1운동 때 일제에게 학살된 한국인은 7,509명, 부상자 1만5,961명, 체포자수가 4만6,948 명에 이르고, 민가 715개, 교회당 47개, 학교 2개소에 불타버렸다.

대소면사무소 입구에 조성된 3.1운동기념공원.
대소면사무소 입구에 조성된 3.1운동기념공원.

소이면 중동리에 조성된 3.1운동기념공원.
소이면 중동리에 조성된 3.1운동기념공원.

◈ 음성군의 3.1만세운동

충북도 내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음성군 독립만세운동은 대표적으로 소이면과 대소면에서 크게 일어났다. 음성군의 만세운동은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의 최초 의거 이후, 18일이 지난 후에야 불붙었다. 3월 18일 음성읍내에서 서당생도들이 만세를 부른 게 최초였고, 4월 1일부터 6일까지 음성군 각 면에서 거의 한 차례 이상 씩 큰 시위를 벌였다.

 

○ 음성읍 만세 운동

음성읍에서는 3월 18일에 천도교인 양준성, 김용진, 신광노, 김두환 등이 주도해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후 3월 28일 오후 4시경, 음성시장에서 만세시위를 벌여, 선창하던 서당 학생 3명과 일반인 1명이 왜경에 체포되었다. 또 4월 6일 밤 9시 경에는 약 500여 군중이 횃불 만세시위를 했다.

 

○ 소이면 만세 운동

소이면 만세운동은 4월 1일 오전 11시경, 한내(한천)장터에서 김을경, 이중곤, 권재학(재신), 추성열, 이교필, 이용호 등 6명이 주도했다. 이날 모인 수천 명의 군중은 소이면주재소를 포위하고 만세를 부르며 활발하게 시위했다. 김을경 등 5명은 한내시장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벌이며 소이면사무소로 쇄도해, 면장 민동식을 앞세워 독립만세를 선창시켜 기세를 올렸다. 이때 김을경, 이중곤이 소이주재소에 체포되자, 유재학, 추성열, 이교필 등이 군중과 함께 구출에 전력을 다하는 한편, 만세시위를 벌였다. 김을경, 이중곤을 체포한 일본경찰은 음성경찰서로 압송하려 했으나, 군중들이 석방을 강력하게 요구하여 소이주재소에 인계했다. 이에 군중은 다시 소이주재소를 포위하고 석방을 요구하며 거세게 항의 시위했다. 오후 3시경 출동한 충주수비대는 시위군중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감행했으며, 희생자 6명, 중상자 4명의 피해가 발생했다. 소이면 만세운동을 주도한 6명(김을경, 이중곤, 권재학(재신), 추성열, 이교필, 이용호)은 체포돼, 일본경찰에 피검돼 청주지청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이용호가 태 90대를 맞는 고문으로 순국하고, 김을경(1년6개월), 이중곤(1년), 권재학(1년), 추성열(6개월), 이교필(6개월) 등은 옥살이를 살게 됐다.

 

○ 대소면 만세 운동

대소면 만세운동은 음성군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 중에서 가장 격렬하였다. 4월 2일 오미장터를 중심으로 전개된 대소면 만세운동은 이성교, 임백규, 임경순, 김달년, 김동식, 송인식, 박병철, 박제성, 이철우, 류해길, 이용학, 민병철, 박영록 등이 지휘했다. 이날 밤에 모인 대소면민 약 1천 명은 오산리 면사무소 소재지로 쇄도하여 독립만세 시위를 벌이고, 두 번에 걸쳐 면사무소 유리창과 의자 등 기물을 파괴했다. 또한 같은 날 밤, 오산리 뒷산에서 송인식, 임병철, 박제성 등 수십 명이 만세운동을 하였다. 대소면 만세운동 주동인물 가운데 이성교는 일본경찰 河野의 어깨를 쇠스랑으로 내리쳐서 중상을 입혔으며, 임경순은 대소면사무소를 불질러버렸다. 대소면 만세운동은 진천수비대의 공격을 받아 만세군중은 해산되고, 이성교, 임백규 등 2명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받았다. 특히 이성교는 옥살이를 마치고 나온 후, 목을 매 자살했다.

 

◈3.1정신 계승, 음성군민은?

이렇게 음성군에서도 치열하게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음성군민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95년전 3·1만세운동을 펼쳤던 선조의 의로운 체취가 살아숨쉬는 소이면 중동리 한내장터와 대소면, 그리고 음성설성공원 일원에서 각각 해마다 그날의 감동과 의미를 재현하는 행사를 개최하며, 목숨바쳐 나라를 구한 분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음성군은 1998년 소이면 중동리에 한내기미독립만세 운동을 기리는 추념비를 세우고, 주변을 공원으로 단장해, 매년 3.1절 기념행사를 개최해오고 있다.

대소면도 군과 주민들에 의해 면사무소 입구에 기념비와 탑을 세우고, 2005년부터 매년 3월 1일에 3.1절 행사를 따로 개최하고 있다.

또 지난해에는 음성희망누리회(회장 우성수) 주관으로 학생 120여 명과 영주귀국사할린동포들과 함께 음성읍 설성공원에서 소이면 한내공원까지 10여km 거리를 독립만세행진을 펼친 바 있다.

그러나 올해는 아쉽게도 AI(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 사태로 인해 음성군에서는 특별한 3.1절 행사를 갖지 않았다. 그리고 1년에 3월 1일에만 행사를 갖는 1회성 행사 뿐, 그 이상의 행사는 전무한 실정. 이제 10만 인구를 넘어서며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음성은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는 3.1 정신을 적극 계승해야 할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1년에 1회성 행사로는 조상들의 희생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충북에서 가장 격렬하고 크게 전개된 3.1운동을 계승하기 위해 음성군은 정책적으로 계발할 필요가 충분하다. 예를 들면 3.1운동과 관계된 역사관을 상설 운영하거나, 체험 프로그램 등 다양한 사업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래서 95년 전, 음성군에서 전개됐던 3.1만세운동의 전통을 다양하게 되살려서 투철한 애향심과 건강한 군민의 정기로 승화시켜야 할 것이다.

소이면 중동리 3.1운동기념공원 안에 세워진 기념비석 뒷면.
소이면 중동리 3.1운동기념공원 안에 세워진 기념비석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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