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의 신비, 성 피터스브르크
그 곳에는 도스또엡스키가 있었다.
문학적 흠모의 열정이 도스또엡스키의 영혼과 교감

바다가 보이는 프리발찌니스키야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인데 창밖은 아직도 어렴풋하게 밝다. 이 박명현상을 일러 백야라 하던가. 모스크바와는 달리 비행기로 한시간 반 날아온 레닌그라드, (지금은 성피터스브르크라 부른다)는 백야현상이 뚜렷했다.
내 삶이 무척 가파로웠던 30대 초반 우연이 읽게 된 도스또엡스키의 단편 <백야>를 접하고 부터 러시아에 대한 꿈을 가슴에 간직했다. 내가 나스젠까라고 착각을 해서 아름다운 공상가를 흠모했고 백야의 밤에 다시 찾아온 연인에게로 돌아가는 나스젠카를 얼마나 부러워 했던가. 그 때부터 자작나무 숲과 백야의 신비가 가슴 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자작나무숲과 작가들.
이제 이순을 넘긴 초로의 여인이 꿈에 그리던 모스크바에 발을 딛는 순간 넓디 넓은 땅에 어디가 끝인지도 모르게 펼쳐진 자작나무 숲은 숨을 멈추게 했다. 누가 일부러 나무의 몸에 흰페인트 칠을 하고 심심해서 칼자국을 낸 것 같은 나무들은 한창 윤기나는 5월의 잎새와 어우러져서 참으로 신선했다.
나는 감탄 속에 거대한 러시아 문학을 떠올리고 있었다.
톨스토이,푸시킨,고골리,체홉,도스또엡스키까지 자작나무가 작품 속에 등장했다. 거침없이 뻗어 올라간 자작나무 숲이 이 땅의 문학과 예술에 깊은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잠겨 들었다. 그것은 넓은 대지를 뒤덮은 민들레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자연이 그 곳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과 도시의 색채, 나아가서 예술의 모태라는 상념에 젖었다.
성 피터스브르크의 첫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잠을 자려고 불을 끄고 누웠는데 밖이 환해서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다시 일어나 창문을 열어 보았다. 저만치서 바다가 철썩이고 사람들이 거닐고 있었다. 잠자기를 포기하고 밤바다를 향해 호텔 넓은 광장을 가로질러 나갔다.
바닷가에는 젊은이들이 사랑을 속삭이고 휘파람을 불었다. 큰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얼굴의 표정은 보이지 않고 실루엣 같은 동작만이 보이는 신비한 백야, 나에게도 젊음이 있다면 누군가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괴이쩍은 생각까지 들게 했다. 백야 탓이리라. 바다에서 돌아다 본 호텔은 객실이 1천2백개나 되는 거대한 덩치에 방마다 불이 환하게 비쳤다. 어느 길손이 나처럼 백야에 취해서 잠못들고 있는 것일까.
사실 성 피터스브르크는 내가 사랑하는 도스또엡스키가 무지무지 사랑한 도시다. 그의 작품 <백야>의 무대도 성 피터스브르크고 <이중인격>도 뻬제르브르크의 서사시라는 부제가 붙을 정도다. 어쩌면 그 밤 우리가 거닐던 바닷가도 지구상에 혼자남은 것 같은 외로움에 그가 거닐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에르키타쥬 국립 미술박물관>

모스크바나 성피터스브르크에는 다섯집 건너 하나꼴로 예술가들의 생가나 세계의 문화유산을 소장한 박물관 미술관이 있고 극장이 있다. 오히려 지금은 그러한 유물들이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다. 우리도 1인당 거금 80달러를 내고 러시아의 정통발레<호두까끼 인형>을 보지 않았던가.
겨울궁전이라고도 불리는 에르미타쥬 박물관은 네바 강변에 있다. 파리의 루부르 박물관, 영국의 대영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불리는 에르미타쥬 박물관은 역대 황제의 거처였던 겨울궁전과 작품전시실로 나뉜다.
호화로운 예술감각이 돋보이는 청색 건물로 각 방마다 특색있는 작품들로 1점당 1분씩만 보아도 전부를 보려면 5년이 걸린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찬란한 문화유적이 많은데 이만큼 가꾸고 돌볼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스또엡스키, 그 찬란한 영혼의 집>

내 젊은 시절을 온통 사로잡은 <까라마조프의 형제들>과 <백치> <죄와벌>을 쓴 작가 도스또엡스키, 나는 그를 만난다는 한가지 만으로도 이번 여행을 축복이라 생각했다.
그가 살던 집은 예스러운 건물들이 서 있는 모퉁이에 있었다. 정원도 한평 없는 자그마한 이층집, 지금은 입장료를 받는 개인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가 쓰던 자그마한 침대와 책상과 식탁 그리고 가장자리에 보푸라기가 인 성서를 보면서 그의 숨결을 느꼈다.
우리가 여기에 오기 전에 알렉산더 네프스키 대수도원에서 잠들고 있는 그의 묘에 가 보았다. 아치문 오른쪽에 있는 그의 대리석 조상 위에는 십자가가 있어 더욱 인상 깊었다.
왜냐하면 그는 초기에는 신을 부정했지만 시베리아 유형에서 돌아온 후에는 종교에 의해서만 러시와와 세계는 구제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내가 그의 문학에 경도되는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은 고통에 의해서만 정화되고 향상된다는 사상이 그의 체험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문학이 처음부터 가난하고 학대받는 인간들에 대한 강렬한 애정과 깊은 연민으로부터 출발한데 깊은 공감을 느낀다.
혹자는 그를 도박을 즐기고 비열하기까지한 인물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인간이 완벽하면 신이지 인간이 아니다. 부족한 자신을 알고 개선해 나가려는 의지가 그의 작중 인물들에게서 강하게 느껴질 때 또 하나의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유대감을 느끼며 위로를 받는다.
그가 <카리마조프의 형제들>을 집필했던 집에서 그의 일생과 문학을 더듬고 마악 돌아서려는 찰라 나도 모르게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끓어오르는 어떤 감격에 잠시 숨을 멈췄다. 그것이 무엇인지 지금도 나는 모른다. 다만 내 흠모의 열정이 깊어 그의 넋과 잠시 만났던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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