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도순

먹을거리가 없어 봄이면 항상 찾아오는 보릿고개를 없애는 것이 우리 농업 행정의 수명적인 과제였었던 때가 있었다. 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벼농사에 모든 것을 동원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때가 지금으로부터 30~40년 전인 70년대 전후.

제때에 못자리를 만들고 좋은 모를 만들어 때를 놓치지 않고 모내기하고 가꾸어서 탈곡 하여 쌀로 만들기까지 88번 손이 가는 벼농사를 제 1의 농사로 다루던 때이다.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새싹으로 생명의 태동을 느끼는 자연의 섭리는 변함이 없지만 배고픔에 지친 우리는 한 톨의 낟알이라도 더 생산하기 위하여 못자리를 만들고 씨를 뿌려 가꾸어서 본 논에 좋은 모를 내는 것이 풍년 농사의 밑거름이 된다는 것에는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았다.

이번 벼농사를 잘하여 많은 양의 쌀을 생산하는 것만이 굶주림을 이길 수 있는 최선의 길이면 행복의 지름길이며 행복의 지름길이라 생각하여 하루 빨리 배를 곯지 않고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고 기대 하였다.

그리하여 살얼음이 약간 있는 논에서 논두렁을 만들고 여기에 모판을 만들어 씨를 뿌리고 물 관리를 하여 좋은 묘를 생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으며 이것이 농사일 의 반이라고 했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낸 모를 본 논에 옮기는 것은 대역사였고 그 것을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해 모를 낼 때가 되면 물과의 전쟁이 아닌 전쟁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때는 저수지도 별로 없어 자연 상태에서 비가 오면 고맙고 안 오면 올 때를 기다려서 자연과 더불어 농사를 하던 때라 모를 내기까지는 물 관리 하랴, 모내기하랴 온갖 힘을 다하다 보면 몸은 앙상한 겨울나무 가지와 같고, 얼굴은 그을다 못해 찌들어서 탄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어려운 생활의 연속이었다.

80년도를 전후해서는 한동네에 경운기를 한두 대 볼 수 있었고, 모내기를 사람의 손으로 할 수 있는 면적은 한 명당 330 정도로 한 섬지기 모를 내기 위하여 그 일에 참여하는 농업인이 35명 내외가 될 정도였다.

들판에 출장을 가면 많은 수의 농업인을 대 할 수 있었고 농심으로 대하여 주었던 그 시절이 추억으로 남는 다. 이런 때에 이앙기가 보급되고 , 보급된 이앙기 1대로 하루에 한 섬지기 논에 모를 낼 수 있었으니 이를 바라보는 농업인에게는 굉장히 신기하고 믿을 수 없는 일 이었다.

손으로 내는 모는 성모라하여 45일을 육묘하여 옮겨심기 때문에 모내기가 끝나면 논이 파랗게 어울릴 정도가 되었으나 이앙기로 모내기한 논에 모는 중모라하여 30일 정도 묘를 키우다 옮겨 심는 것으로 이앙이 끝나고 나면 저것이 벼농사를 될까하여 우련하던 농업인들의 모습이 생생하다.

그때를 돌아보며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이제는 손으로 모내기한다는 것이 옛날이야기 책에나 나오는 소설 같은 이야기로만 느끼게 되고 현재는 모내는 기계 위에 앉아서 잘 정리된 논을 가로지르며 옛날 같으면 백여 명이 할 수 있는 일을 농업인 둘 내지 셋이서 해결을 하여 모내기로 바쁜 들판에 가도 몇 명의 농민들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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