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영 전 청주고등학교 교장 칼럼리스트

40여년전 충주중학교에 근무할 때였다. 수업을 마치고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멍하니 서 잇던 내 모습이 생각난다. 아버지께서는 팔남매의 둘째이셨으니 우리는 따로 살았지만 나는 할머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어린시절을 보냈다.

청주고 재학시절, 어쩌다 집에 가면 할머님께서는 뜸부기를 고아 놓으시고 저를 불러 다 먹을 때까지 지켜보셨고, 군에 입대(入隊)하는 손자에게 비자금(秘資金)으로 갖고 계시던 용돈을 쥐어 주시며 이제 네가 제대하는 것을 못 보겠구나 하시며 눈물로 전송하시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할머님께서는 젊으셨을 때는 종가(宗家)의 맏며느리로 가정의 대소사를 맡으셔야 했고, 떠도는 사람들에게 숙식(宿食)을 제공하시던 조부님의 뜻에 따라 영일(寧日)이 없으셨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에는 팔남매를 혼자 키우시며 집안의 어른으로, 마을의 어른으로 큰 자리를 지켜오셨고, 근엄 하시면서도 정(情)이 많으셨다.

백부님께서는 효성이 지극하시어 매년 할머님 생신은 집안의 잔치요, 동네, 잔치 날이 되었다. 정부인(貞夫人)이셨던 시할머니와 숙부인(淑夫人)이셨던 시어머님 뒤를 이어 사천현감을 지내신 시아버지께선 청빈하신 생활로 물려받은 재산 없이 종가(宗家)를 지키시며 팔남매를 키우셨으니 어렵고 힘든 세월이셨지만 백부님께서는 50년대의 가난한 시절에도 엽총을 소지하시고 사냥을 하시어 할머님을 극진히 모셨다.

일제(日帝)의 강점기에 아들을 강제징병으로 사지(死地)로 보내시고, 6.25전쟁을 겪으시며 한시도 걱정이 그칠 날이 없으셨던 할머님. 모든 시름 잊으시고 어떻게 저희들 곁을 떠나셨는지? 할머님께서는 내가 교직에 들어와 충주에서 신접살림을 할 때 손자의 사는 모습을 보시고 대견스러워 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할머님 모신 상여가 떠나던 날 그렇게 목 노아 울었는데 할머님 생각이 잔잔한 마음으로 내 가슴에 남아 있으니 내가 불효(不孝)인가 보다.

얼마 전 귀향길에 백부님 댁에 들렸더니 정적이 감돌며 무성하던 대추나무는 자취를 감추고 그루터기만 남고 어린시절 친구들과 뛰놀던 마을에는 여기저기 빈집이 버려진 채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 속에 덧없는 인생임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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