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실

전염성이 강한 홍역에 대해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관리 하면서 언제부터인가 초등학교에 아이를 입학시킬 때는 홍역 예방접종 확인서를 의무적으로 제출해야만 한다.

유난히 눈도 많고 추었던 올해 1월 초등학교 입학하는 둘째 아이 손을 잡고 보건소에 데리고 가 예진표를 작성하면서 내가 꼭 우리 아이 만큼의 나이였던 삼십오 년 전 그때를 기억해 던 것은 , 산수유 열매만큼이나 붉은 열꽃이 온몸에 돋아나면서 앓았던 홍역으로 학교를 보름 동안이나 빼먹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친정집은 이사 한번 안 다녀 그대로 시골에 있지만

그 때 시골 사정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길도 꼬불꼬불 인데다 버스 한 대 다니지 않았고 병원도 오리 이상을 걸어 나가야 있던 시절이었다. 두 살 터울인 언니와 나는 쌍둥이처럼 옷도 똑같이 입고, 늘 같이 붙어 다니면서 싸움도 잦았는데 홍역마저 같이 앓게 된 것을 간호하다 우연히 동네에 오신 의사선생님을 통해 홍역인 걸 알게 되셨다고 한다.

홍역은 40도 까지 고열이 오르고 열꽃이 활짝 피고 나서야 가라앉는데, 언니와 내가 절정으로 아플 때 동네아주머니 한분이 오셔 울고불고하는 언니와 조용히 입 다물고 끙끙대며 앓고 있는 나를 보시고는 “큰애는 쨍쨍이, 작은애는 착한이네”라고 하셨단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온 동네 소문으로 짝 펴져 착한이 애기는 슬그머니 사라지고 언제부터이간 언니 별명은 아예쨍쨍이로 붙박이가 되어 버려 온 동네 사람이 다 알게 된 것이었다.

세월이 훌쩍 흘렀다. 그 때 지금의 딱 내 나이적 우리 엄마는 호호백발에 허리 굽어 팔십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되셨고 나는 사십대 초반 그 때 엄마의 모습과 유난히도 닮아 있다.

이제는 나하고는 같이 도시에 살고 있지만 그 시절 윗집에 사셨던 아주머니가 지금도 나한테 “쨍쨍이도 잘 지내지?”라며 웃으며 언니 안부를 묻고 하신다.

지금이라고 친정동네 경로당에 가서 어르신들을 찾아뵙고 ‘쨍쨍이’가 누군가요? 묻는다면, 단박에 언니이름을 듣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수운일 일게다. 한지만 이제 경력20년의 초등학교 선생님이 된 언니를 누가 감히 ‘쨍쨍이’라고 부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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