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재영 전 청주고 교장, 칼럼니스트

20년 전 이른 새벽 밝아오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황금물결이 출렁이는 들녘을 거쳐 백마령 넘어 그리운 고향, 보천에 도착했다.

차례를 지낸 후 부모님을 모시고 형제들과 자녀들이 함께 성묘를 떠났다.

성묘는 조상의 무덤을 찾아 돌보고 예(禮)를 올리는 것으로 배분(排墳), 배소례(排掃禮)라고도 한다. 봉분(封墳)을 돌아보고 가시나무나 잡초 등을 깨끗이 제거하는 것으로 벌초(伐草)라고도 하며 그 다음 간단한 음식을 올리고(薦食) 조상을 추모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설 단오(端午)한식(寒食)추석 등에 성묘를 한다. 지금은 보통 봄, 가을 두 차례에 걸쳐 하는데 한식의 성묘는 잔디가 잘 자라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고 추석의 성묘는 이듬해에 잔디가 잘 자랄 수 있도록 정비하는데 목적이 있으며 조상을 추모하여 효(孝)의 구체적 표현이다.

조상님들의 묘소에 이르러 성묘를 하게 되었다. 예조참판을 지내신 고조부께서는 지방관으로 계실 때 선정을 베푸셨고(名官篇), 증조부께서는 사천 현감으로 한일합방에 十日不食하시어 自絶하시었으며(節義篇), 20세에 남편을 사별(死別)하시고 우리 형제의 어린시절을 보살펴 주시던 조부님의 사촌형수께서는 80평생을 수절(烈女篇)하셨다는 陰城郡誌의 내용과 조부님께서는 초시(初試)에 급제 하신 후 마을 앞동산에 蘭亭을 세워 마음 맞는 팔도 유생들과 봄, 가을로 시작(詩作)을 하시고 떠도는 걸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셨다는 이웃의 연로한 어른들의 말씀을 한분 한분 묘소에 성묘하며 자녀들에게 들려주었다.

성묘가 끝난 후 넓은 잔디밭에 앉아 부모님께서 살아오신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모친께서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시어 경제적으로 어려운 몰락한 양반가(兩班家)에 출가하시어 공무원인 부친께서 보내주시는 봉급으로 가계부를 쓰시며 7남매를 구김살 없이 키우셨고 부친께서는 자식들을 위하여 공직을 사직하신 후 맨손으로 출발하시어 밤을 낮 삼아 근검절약하는 생활로 자수성가 하시고 아무리 어려워도 남의 도움을 받거나 신세를 지지 않으시고 수입에 맞추어 節制생활을 해 오셨음을 들려 주셨다.

“가정은 최초의 학교”라고 한다. 페스탈로치는 “가정은 도덕의 학교”라고 하여 가정교육의 중요함을 강조했다. 그러나 오늘의 핵가족제도와 산업구조 아래서 가정교육이 不在인 현실 속에서 가족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중추절의 성묘는 가풍(家風)을 바로 세우고 뿌리교육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겨진다.

爲民행정을 베푸신 고조부님, 盡忠報國하신 증조부님, 烈女로 80평생을 지내신 조부님의 사촌 형수님, 白馬山風月主人으로 이웃사랑을 실천하신 조부님, 節制와 근면으로 어려움을 딛고 살아오신 부모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들의 생활을 自省하고 자라나는 자녀들에게는 삶의 방향을 바로 잡아주어 조상님들께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성장하고 생활하도록 도와주며 尊祖和睦하는 계기가 되었다.

省墓는 3代가 자리를 같이 한 뿌리교육의 場이 되었는데, 16년 전에는 어머님께서, 8년 전에는 아버님께서 우리 곁을 떠나셨으니 옛 이야기가 되었으며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중추절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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