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상 준 음성교육지원청 교육장

‘음성(陰城)’의 지명 유래

 

『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지에 보면, ‘음성’의 옛 이름은 ‘잉홀(仍忽)’이었으나 통일신라로 들어오며 ‘음성(陰城)’으로 바뀌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음성의 옛이름인 ‘잉홀’에서 ‘홀(忽)’이란 고구려 말로 ‘성읍(城邑)’을 의미하므로 음성의 옛 이름이 ‘잉홀’로 불린 것은 고구려·백제와 관련하여 일찍부터 성(城)을 가진 고을이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음성(陰城)’의 이름이 생긴 것은 신라가 문무왕 8년(668)에 삼국통일을 이룩하고 경덕왕 16년(757) 12월에 신라 전국에 9주를 두고 군현(郡縣)의 명칭을 고칠 때 ‘잉홀(仍忽)’을 ‘음성(陰城’)으로 고쳤다. 이당시 전국의 땅이름이 순수한 우리말로 되어 있어 속되고 방언이 섞인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아름다운 이름으로 고치고자 한자음으로 표기하였다고 전한다.

그 과정을 유추해 보면 잉홀(仍忽)의 ‘홀(忽)’은 ‘고을’ 또는 ‘읍성(성안에 있는 고을)의 의미이므로 ‘성(城)’으로 표기하고 ‘잉(仍)’은 한자의 음을 빌려 표기하는 가차(假借)의 방법(그 당시 널리 쓰인 방법)으로 '陰'의 한어 발음이〔y?n〕이므로 ‘잉(仍’과 소리가 같아 ‘음(陰)’을 택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같이 한자로 바꾸어 표기하는 과정에서 오랜 세월 변화를 거쳐 온 우리말 지명의 정확한 의미를 모르는 경우에는 한자의 음만 빌려 쓰거나 훈으로 표기할 때 큰 혼란을 겪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942년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음성군의 산성으로 열 군데가 기록되어 있다. 성은 평상시 거주하는 읍성의 성격과 유사시 들어가 농성하는 산성으로 크게 구분하는데,『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서는 음성의 성들을 대부분 산성으로 분류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지금까지 음성 지역에서 조사·발굴된 성터들은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거나 마을 이름을 따서 부르고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 시대에 음성(陰城) 지역에 읍성(邑城)이 존재해야 하는데 그 흔적은 음성읍 신천리에 있는 ‘신천리 토성’이 유력하다.

‘신천리 토성’은 음성의 중심부에 있는 네모꼴 토성으로 유일하게 평지에 있다. 역말의 남쪽에서 국도 37호선이 성터의 남쪽과 합류하며, 점말이라 불리는 곳의 남쪽은 소여천(所餘川)의 동서로 들판을 이루어 성리뜰이라 불리고 있다.

신천리 토성은 이곳의 유응주택을 감싼 남북으로 긴 네모꼴의 토성으로, 둘레 465m, 높이 2.4m로 있었으나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모두 파괴되었다. 당초 옛길인 돌명이(신천5리)와 찬샘들(신천3리)의 북쪽으로 동쪽의 오리정뜰을 거느린 중심부로, 해발 140m 내외의 구릉 선단부에 해당되었던 곳이므로 옛 고을이 있었을 가능성이 가장 큰 곳이다.

 

 

 

저작권자 © 음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