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영

 정월 대보름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쥐불놀이다. 아이들은 꿈을 어른들은 추억을 돌린다.

요즘은 모유보다 분유를 먹이는 집이 많아 깡통 구하기가 쉽지만 내가 초등학교를 들어갈 무렵인 70년대 만 해도 시골에서 깡통 구하기는 계란프라이 먹기보다 어려웠다.

그래서 한 번 썼던 깡통은 자기만의비밀 장소에 잘 모셔놨다가 이듬해 다시 쓰고 했다.

깡통을 구하지 못한 아이들은 최고의 불쏘시개인 관솔을 제공하거나 다른 먹을거리를 깡통이 있는 친구에게 상납하고 불 깡통을 돌릴 기회를 얻었다.

깡통은 아래도 잘 뚫어야 하지만 최적의 조건에서 취불 놀이를 질기려면 깡통의 측면 부위를 낫으로 길게 상처를 내줘야 한다. 이런 조건에서 불씨와 관솔, 나뭇가지를 넣고 돌리면 힘들이지 않고 손쉽게 불이 살아나며 끝내 주는 화력을 자랑하게 돼 주변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게 된다.

쥐불놀이가 한창 무르익어갈 무렵이면 윗동네와 아랫동네의 아이들이 한바탕 쥐불놀이 전쟁판을 벌인다. 작은 냇가나 논배미 등을 경계로 절정에 다다른 불 깡통을 상대에게 던지기 시작한다.

이때는 검은 하늘을 가르며 날던 깡통이 불씨를 토해내기 시작하고 땅에 닿는 순간까지 긴 타원을 그리며 날며 불씨가 은하수처럼 낙하한다. 수십 개의 불 깡통이 날아다니니 그 모습 자체가 장관이다.

하지만, 즐거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불 깡통을 피해야 할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은 깡통에 돌을 넣어 던기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깡통으로 피해를 본 사람이 짱돌을 날리기도 한다. 쥐불놀이를 하면서는 항상 전방을 주시하고 방패를 준비하거나 현장의 자연 지형을 잘 이용해 피해야 한다.

쥐불놀이 전쟁은 양쪽 중에서 한 사람이 머리가 깨지는 등의 상처를 입었을 때 대충 정리가 된다. 지금 같으면 “우리 새끼 누가 그랬냐”라며 경찰을 부르고 난리가 났을 텐데 그때는 그 집에 찾아가 용서를 빌면 큰 무리 없이 마무리됐다. 다친 친구는 십중팔구 상처 부위에 된장떡을 얹고 있고, 좀 산다는 집은 만병통치약이었던 빨간약을 바르고 있다.

다음으로, 재미있었던 놀이는 밥 서리였다. 쥐불놀이를 끝내고 돌아오면 체력을 많이 소모해서인지 시장기가 몰려온다. 이때는 큰 함지박을 들고 이 집 저 집을 돌며 밥과 반찬을 서리했다. 시골의 보안 시스템이라야 누렁이 한 마리와 문고리 걸쳐 놓는 것이 고작 이었으니 밥 서리는 식은 죽 먹기였다.

개가 짖으면 그 집 아이를 앞세워 들어가면 되고 설사 들키더라도 크게 꾸중하는 사람이 없었다. 집주인은 오히려 밥과 찬을 더 챙겨주곤 했다.

항상 희희낙락만은 아니었다. 동네에서 무섭기로 유명한 재열이 엄마에게 걸려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밥 서리를 끝내고 돌아 나오다가 발을 헛디뎌 긴장 항아리를 덮쳐 항아리가 박살 난 것이다.

그때만 해도 동네에서 함깨나 쓰던 나였기에 나보다 약한 친구 기수에게 덮어 씌었다. 착하기만 했던 기수는 아무 항변도 못하고 꼼짝없이 혼나고 항아리 값 물어주고 간장 퍼다 주고 난 후에야 용서를 받을 수 있었다.

서리해온 밥과 찬은 한 곳에 모아 비비게 된다. 왜 그리 맛나던 지… 비빔밥으로 유명하다는 그 어느 음식점을 가도 그때 먹던 맛을 느끼지 못했다.

잠깐이었지만 어린 시절 행복한 추억 여행을 한 듯하다. 지금 우리 딸이나 아들이 아빠 나이가 되면 어떤 추억을 떠올릴지 궁금하다. 혹시 ‘어느 학원 선생님이 잘 가르쳤다.’라거나 ‘어떤 컴퓨터 게임이 재미있었다.’라는 식의 추억을 떠올리지나 않을까 걱정된다.

‘정’ 이 메말라가는 요즘 우리 어린 시절과 같이 밥을 서리하다 집주인의 신고에 의해 체포돼 처벌을 받았다면 어떤 벌을 받았을까.? 형법 제 329조 절도

죄로 6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 이하의 벌금을 물린다. 또한, 야간주거침입에 2인 이상이 합동절도 했으니 특수절도죄로 징역 1년 이상 10 이하의 형벌에 처한다.

어느 개그맨의 유행어가 떠오른다. ‘씁쓸 하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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