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상 준 전 음성교육지원청 교육장

 피아골과 피난골

 

‘피’자가 들어 있는 지명이 전국적으로 매우 많이 산재되어 있는데 ‘피’라는 음은 ‘피(血)’가 연상되기에 유명한 지리산의 ‘피아골’이나 충북 보은의 ‘피반령’의 예와 마찬가지로 지명에서 ‘피(血)’과 관련된 여러 가지 유래와 전설이 전해져오기도 한다.

삼성면 용성리에도 ‘피아골’이라는 지명이 있어 그 어원을 찾아서 의미를 알아보고자 한다. 일찍이 벼농사가 시작되기 전에 우리 조상들의 주식이었던 ‘조’라는 곡식을 예전에는 ‘피’라고 했는데 벼농사를 짓기 시작한 후 논의 잡초인 ‘피’와 발음이 같아 그 의미를 잃게 됐다.

 정약용의「아언각비(雅言覺非)」에 의하면 “옛날 수전(水田, 논농사)이 아직 성하지 않을 때에 백성들은 ‘피’(稷-기장이라는 곡식)를 먹으며 이를 항상 먹는 식량으로 삼았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잘못 전하여짐이 심하여 ‘돌피(?稗)’를 ‘피(稷-粟)’로 생각하였고 이것이 굳어져서 부술 수가 없다. 대저 ‘돌피(?稗-돌피제, 피패)’는 모양이 벼와 같으면서도 달라서 오곡의 열에 들어가지 않는다. 방언으로 이를 ‘피’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피(禾皮)’ 와 ‘패(稗)’가 옮겨진 것이다.”라고 하여 논에 있는 ‘피’와 우리 선조들이 주곡으로 먹던 ‘피’를 구분하지 못하게 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으로 보아 ‘피(稷)’는 주곡이었던 만큼 마을 주변에는 피밭이 많이 있었을 것이고 ‘피밭’이라는 지명이 많이 남아 있게 된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중국 초나라에서 도 ‘황미(黃米)’라고 하여 오곡의 하나로 들고 있었던 것은 ‘피(稷)’가 주곡이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에 관련된 지명이 충북에만도 ‘핏골’(稷洞, 옛날 이곳 주민들이 피농사를 지으며 살았다고 전함 - 영동 심천), ‘피밭자리’(稷田, 피밭이 있었음 - 영동 상촌), ‘핏들’(稷坪 - 영동 상촌, 영동 매곡), ‘피티, 핏재’(稷峙 - 단양 대강), ‘피재’(稷峙 - 제천 봉양, 제천시 모산동), ‘피밭골’(단양 가곡), ‘피박골’(단양 대강), ‘피전, 피전거리’(음성 소이 갑산) 들이 있으며 한결같이 ‘피’의 어원이 한자표기인 ‘직(稷)’으로 남아 있고 ‘피밭골’이라는 원형이 남아있는 것도 볼 수 있어서 ‘피밭’과의 연관성을 짐작할 수가 있다.

 그리고 ’피밭골‘이 ’ㅂ탈락‘이라는 언어 변이 현상을 거치면서 ’피아골‘로 불리다 보니 난리를 많이 겪은 우리 민족으로서는 ‘피난 가는 골짜기’, ‘피로 물든 골짜기’ 로 지명의 의미를 부여한 곳도 많으며 아예 ‘피난골’로 불리는 지명이 충북 지역에도 음성 금왕, 음성 원남, 청원 문의, 청원 오창 등에 남아 있다.

단양 가곡의 ‘피화리(避禍里)’는 ‘피밭리’가 ‘피아리’로 변이된 후 ‘피한다’는 말과의 유사성 때문에 ‘난리를 피한다’는 의미로 해석하여 한자 표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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