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희 강동대 교수

오대산 상원사를 찾아 가는 길목에 월정사가 있다.

월정사 일주문에서 1km가 넘게 전나무 숲길이 이어진다. 장쾌하게 쭉 뻗은 전나무 숲길을 걷노라면 산중의 고요를 맛본다.

이 고요속에 월정사를 지나 맑고 맑은 계류 길 따라 상원사를 오르면 바람소리, 새소리, 물소리 등이, 어느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없는 감상곡 되어 흐른다.

자연의 신비 따라 오대산의 야생화가 미소를 짓고, 조릿대 나무가 바람에 나부낌과 함께 바람에 쓸려 비파소리를 낸다.

이 소리를 천상의 소리다.

아니 여옥이 범종의 비천상에 공후(空喉)와 생(笙)을 불면서 비천하는 상원사의 소리다.

상원사의 동종은 신라 성덕왕신종(에밀레종)보다 45년이나 앞서 만들어진 범종으로, 조각 장식이 아름다움은 물론 종소리도 매우 고와 통일신라 최고의 작품으로 국보 제 36호로 지정되어 있다.

우리나라 범종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시기는, 삼국시대로 추정을 한다고 한다. 당나라 소정방이 나당 연합군으로 부여를 점령하고 정림사지에서 시를 읊었는데, “더웅덩 더웅덩 종소리를 울리는 밤, 맑은 범패소리는 새벽바람에 실려 온다.”라는 시구가 내려와, 범종이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 된다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범종은 8세기 후 통일신라시대부터 남아 있다.

모든 범종들이 그 빼어난 소리에 걸맞게 크고 우람하면서도 날씬한 몸매, 알맞은 공간 구성과 아름다운 갖가지 문양들이 범종들이다.

이 범종이 남아 있는 곳으로는, 상원사 동종, 선덕왕 신종, 비천상 부분만 남아있는 실상사 등 9세기 종과, 일본에 가있는 5점을 합하여 11점의 범종이 있다 한다.

이 빼어 난 종들이 남아 있어서, 중국과 일본을 제치고 한국종이라는 학명을 얻게 되었고, 그 빼어남도 세계 제일로 꼽히고 있다.

신라의 범종이 아름답고 우아한 것은 제작 구성에 있다.

이 범종의 구성을 보면 용뉴, 음관, 천판, 상대, 유곽, 유두, 비천상, 당좌, 하대로 조각되어 있다. 그 중 상원사 동종은 높이 1.67m,종구 97cm로 종소리 또한 빼어나다.

그러난 이 아름다운 종소리를 들으려 찾아 갔지만, 현장에서는 들을 수가 없었다.

종을 보호하기 위하여 범종각에 안치한 종을 교도소의 창살처럼 막아 타종을 금하고, 옆에 새로운 종각을 짓고 범종을 주조하여 타종하고 있었다.

이 범종을 보기 위하여 머나먼 곳에서 찾아 온 서운한 마음에 범종각을 돌면서 유심히 종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창살이 너무 좁아 몸체에 조각된 모든 문양을 볼 수가 없었다.

상원사 범종은 상대, 하대에 아름다운 당초문이 새겨져 있고, 종신 사이에 하늘을 나는 비천상에 아름다운 당초문이 새겨져 있고, 종신 사이에 하늘을 나는 비천상이 조각되어 있다.

비천상은 좁고 길더란 천의를 너울거리며, 연꽃방석 위에 무릎을 꿇거나.

꼬리가 긴 꽃구름을 타고 푸른 하늘에 떠서 두 여인이 악기를 연주하며 하늘로 비천하는 모습이다.

비천상에 구름을 타고 공후라는 악기를 타면서 비천하는 여인의 모습을 고조선때 여류 음악가요, 시인인 여옥의 모습라고 전하여진다.

공후라는 악기를 본 사실은 없고 연주를 들어본 사실도 없다. 그저 고조선 문학사에서 전하여오는 최초의 여류 시인이자 최초의 음악을 전해준 공후인에 따른 배경설화의 여인, 여옥이란 사실일 뿐이다.

고조선 때 여옥의 남편인 곽리자고라는 사공이 강변으로 나갔다 한다.

그깨 한 노인이 머리를 풀어 헤치고 술병을 손에 든 채, 강가로 뛰러들어 급류에 떠나러 갔다.

강물에 뛰어 들은 노인의 아내는 남편이 강물에 떠나려가자, 공후를 들고 나와 공무도하가를 애달프게 부르고는 강물에 몸을 던졌다. 이를 지켜본 사공인 곽리자고가 집에 돌아와, 아내인 여옥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 해줬다. 여옥이 자기 일처럼 슬퍼하면서, 남편을 따라 죽은 여인의 애달픈 마음을 4구형식 서정이 빼어난 공후도가에 공후인이라는 악곡명을 붙여 노래를 불렀다 한다.

공무도하가

님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님은 그예 강물을 건너고 말았네

물에 휩쏠려 돌아가시니

님이여 이 일을 어이 할꼬

두 노인의 사랑의 죽음에 여옥이 가슴 아파 울면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과 노래가 얼마나 슬펐든지, 고조선 사람들도 울고 산천도 울었다 한다.

그때부터 통일 신라에까지 여옥의 모습과 공후도하가 전설처럼 전하여졌다.

불교와 도교가 혼합되어 범종이 제작될 떼에, 여옥의 모습이 범종의 비천상으로 조각되었다.

공후라는 악리를 타면서 천의를 너흘거리며, 머리카락이 하늘로 솟아 바람에 나는 비천하는 여인상으로 양가되었다 양각되었다.

상원사의 범종은 국내에서 현존하는 신라시대의 최고最古, 최미最美의 범종으로 한국 범종의 조형인 동시에 규범이 되는 종이다.

종의 맨 위에 용뉴를 구비하고 종신에 견대와 하대, 유곽, 유두, 당좌, 비천상 등을 갖춘 한국범종의 가장 뚜렷한 특징을 완벽하게 구비하고 있다.

상하대의 문양대가 짜임이 있고, 아름답게 장식된 가운데 상하 모두를 연속적인 구슬 모양으로 두른 다음, 유려한 당초무늬로 채우고 있다. 그 다음은 양각한 반원 속에 2인 내지 4인의 주악 상을 나타내고, 상대에 붙여서 당초무늬로 양각한 유관 4개을 장식하고, 그 속에 연꽃 유두 9개를 돌출시켜 배치하였다.

종신 공간 대칭되는, 그 속에, 구름 위에 무릅을 세우고 앉아 천의를 날리며 하늘을 나는 공후와 생을 주악하는 비천상이 양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비천 사이에 각목으로 종을 치는 당좌가 있는데, 당좌 부분을 여덟 개의 연잎을 두르고 원외의 안팎에 섬세한 연주 문을 두른 다음, 그 속에 당초문을 장식 하였다. 범종의 정상의 정상에는 용통과 음관이 있는데, 그 제작 수법이나 양식이 우리나라에서 제일이다. 특히나 용뉴를 중심으로 좌우에 글씨가 음각되어 제작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종을 제작한 사람들의 이름과 관직명도 알 수 있다. 이 명문에 “개원 13년”은 당나라의 연호이며 신라 선덕왕 24년 (서기 725년)3월 8일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종은 원래 어느 절에 있던 종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세조가 상원사에 바치려고 전국을 수소문하여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종을 골랐는데, 그것이 바로 안동 누문에 있던 종이였다. 이것을 1469년 현재의 상원사로 옮겨 왔다 하는데, 신기한 일은 안동 누문에 걸려있던 종이 꼼짝도 하지 않아 종류 하나를 떼여내니, 비로소 종이 움직였다 한다.

이 전설을 입증하듯 지금도 유곽 안에 9개의 종류 중 하나가 떨어지고 8개 밖에 없단다. 신비의 상원사 범종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아쉬워하며 나오는데, 갑자기 운해가 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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