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우재 전투 승리....북쪽 지방 피난민들 숨어들고

감우재 전승기념관 내부에 전시된 구멍난 철모 모습.
감우재 전승기념관 내부에 전시된 구멍난 철모 모습.

감우재 전승기념관 내부에 전시된 총탄에 깨진 마을 종 모습.
감우재 전승기념관 내부에 전시된 총탄에 깨진 마을 종 모습.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던가!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 자, 다시 그 역사를 반복할 것이다.’ 이 유명한 문구는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적혀 있다. 이는 이탈리아 로마 태생의 미국 철학자 죠지 산티야나가 역사 공부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한 말.

지난 6월 25일은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65년째 되는 날. 무엇보다 본보는 이 땅에 다시는 이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민족의 뼈아픈 역사인 6.25전쟁 당시, 음성 지역에선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소개하려고 한다. --편집자 주--

감우재 무극 전쟁기념관 전시실에 있는 소여리 전투 상황 모형도.
감우재 무극 전쟁기념관 전시실에 있는 소여리 전투 상황 모형도.

▶ 감우재 전투 승전보, 국민에게 전쟁에 대한 자신감.긍지 심어줘

음성지구(감우재)전투는 1950년 7월 4일부터 7월 10일까지 충북 음성군 읍성읍 소여리, 금왕읍 무극리, 생극면 병암리 일대에서 감우재를 중심으로 벌어진 전투를 말한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기습적으로 전쟁을 도발해 파죽지세로 남하해, 4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질풍노도의 기세로 남진을 시도했다.

당시 수준낮은 장비를 보유한데다 타부대 병력과 낙오병으로 재편돼 전투력이 아주 형편없었던 국군 제6사단 제7연대는 장호원에서 충북 음성군 방향으로 남하하는 북한군 제15사단(사단장: 소장 박성철) 49연대를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고, 7월 4일 음성군 방면으로 이동해 방어망을 구축해 교전을 준비했다.

1950년 7월 5일 오후 1시경, 국군 제6사단(사단장: 김종오 대령) 제7연대(연대장: 임부택 중령)소속 1대대 3중대(중대장:김명익 중위)는 음성군 음성읍 감우재(기름고개,유현)를 넘어오는 북한군 15사단 49연대 첨병소대를 발견, 소여리 부근에서 적군을 유인.포위하여 섬멸했다. 이는 비록 소규모 전투였지만, 6.25전쟁사 가운데 분명하게 국군 최초 승전보를 울린 것으로 남진하는 북한군을 퇴각시킨 최초의 쾌거다.

국군은 7월 6일과 7일,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에 있던 북한군을 공격해 무극리를 탈환한 데 이어, 음성군 생극면 병암리 지역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곧 북한군으로부터 반격을 받아 후퇴해 부용산과 무극리 남쪽 백야리 351고지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7월 8일 국군 제6사단 7연대는 서부에서 이동한 제1사단 제11연대에 진지를 인계하고, 음성군 원남면 보천리 방면으로 이동했으며, 이때 대거 남하해온 북한군 15사단 병력을 맞아 국군 제1사단 제11연대는 감우재에서 2차례 전투를 벌여, 적 1개 중대를 섬멸하고, 재차 공격해 오는 2개 중대도 격퇴시켰다.

7월 9일, 북한군 1개 대대 병력이 재차 공격해 오자, 감우재에서 제11연대 제2대대는 또 다시 적을 격퇴시켰으나, 7월 10일 전력을 충원한 북한군이 대규모로 총공격함에 따라, 전력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괴산 지역으로 후퇴하며, 6일간 전투는 막을 내렸다.

감우재 일대에서는 총 4차례에 걸쳐 전투가 벌어진 결과 북한군 2,707명을 사살했고, 170명 포로를 사로잡았으며, 각종 포 24문, 박격포 7문, 차량 65대, 장갑차 7대, 기관총 55정, 소총 1,187정, 무전기 4대를 노획하는 등의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반면 국군은 71명 전사, 113명이 부상당했다.

음성 감우재전투는 다른 전투와 비해 소규모 전투에 속할 뿐만 아니라, 지역과 전략적 중요성이 덜해 각종 6.25전쟁 기록에서 누락돼 안타깝기만 하다. 그러나 감우재 전투는 6.25전쟁 발발 10일이 경과하며 파죽지세의 북한군 기세를 꺾는가 하면, 패퇴를 거듭하던 국군이 거둔 최초 승전으로서 국군과 국민들 가슴에 전쟁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준 쾌거였다.

당시 상황을 주민들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당시 7세였던 감우리 전 이장 안병화 씨는 소여리 논과 밭에서 시뻘건 핏자국을 많이 목격했다고 증언했으며, 미국에 거주하는 정용헌 씨는 당시 무극리에 살 때, 하루 사이로 북한군과 국군이 이동하는 것을 보았다고 전화를 통해 알려왔다.

백야휴양림이 들어선 금왕읍 백야리 '피난골 ' 모습.
백야휴양림이 들어선 금왕읍 백야리 '피난골 ' 모습.

▶ 북쪽 지역 피난민들에게 안전처 제공

6.25 전쟁 당시 음성 지역은 북쪽으로부터 이동해온 피난민들이 많았던 것으로 주민들은 증언한다. 대표적인 피난처로는 금왕읍 백야리, 음성읍 동음리, 맹동면 군자리와 통동리 일대. 최근 음성군이 조성한 백야휴양림이 자리잡고 있는 백야리 일대는 일명 ‘피난골’로 불릴 정도로 피난민들에 은신처가 되었다고 한다. 이는 주요 도로와 멀리 떨어져 있으며 산속에 위치한 음성읍 동음리, 맹동면 군자리 통동리가 피난민들에게 안전을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6.25 당시 18세였던 김종복 씨(83세. 서울 성북구 거주)는 “우리 집이 경기도 가평에 살았는데, 전쟁이 나서 일가족이 양평, 여주를 지나 음성 무극까지 피난을 갔다가 돌아왔다”고 회고했다.

또 양평이 고향으로 6.25전쟁을 피해 음성까지 왔다가 완전히 음성에서 정착해 살고 있다는 양 모(여.78세.대소면 거주)씨는 “6.25가 일어나서 여주, 음성까지 왔다가 북한군이 다시 퇴각하면서 양평으로 돌아가지 않고 대소에서 완전히 머무르게 됐다”고 사연을 털어놨다.

무극전적지에 있는 감우재 전승기념관 전경.
무극전적지에 있는 감우재 전승기념관 전경.

▶ 관공서 대부분 7월 8일~9월 하순까지 폐쇄, 이후 정상 찾아

6.25 전쟁이 일어나며 음성군에 있는 관공서들은 어땠을까? 월등한 전력을 갖춘 북한군의 기습으로 시작된 6.25전쟁은 전세가 급속도로 기울어진 초기 상황으로 인해 음성군, 음성경찰서, 음성교육청은 관련 자료 대부분이 소실되거나 파기돼, 안타깝게도 현재 많은 자료를 갖고 있지 못한 실정. 대두분의 관공서는 감우재 전투 종료 시점인 1950년 7월 8일 이전까지는 정상적으로 업무를 봤으나, 7월 8일부터 인천상륙작전 이후 9월 하순까지는 폐쇄했다가, 이후 다시 정상을 되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1945년 광복과 함께 9개 면으로 새롭게 시작된 음성군은 2대 유신목 군수(1949.8.20~1953.1.14)와 3대 이학래 군수(1953.1.15~1955.6.3)가 재직했다는 단편 자료만 확인할 수 있었다.

음성교육청은 6.25 전쟁 이전의 자료들은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전쟁중이던 1952년 6월 시.군교육자치제가 실시되며, 8월 교육구청이 개청되고, 남희원 교육장(1952.8.8~1953.8.25)이 초대교육장으로서 전쟁 중에 근무한 것으로 알려졌다.

광복 해인 1945년부터 1995년까지 2개 파출서와 8개 지서 체제를 운영해왔던 음성경찰서는 4대 서장 이용기 경감(1949.9~1950.8), 5대 서장 허관 경감(1950.8~1952.4), 6대 서장 이진숙 경감(1952.4~1953.11)이 전쟁 기간 중에 역임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서는 1950년 8월 북한군 지배 아래서 연무관이 소실됐으나, 9월 하순 북한군이 퇴각함에 따라 다시 경찰업무가 회복됐으며, 특히 전쟁을 치르며 직접 전쟁에 참여하거나, 방첩대를 조직해 공비를 토벌하는 데 앞장선 결과, 25명 경찰관이 순직해 그 위패가 무극전적지에 안치됐다.

당시 음성군민들은 국내 크고 작은 전투에 참여해 유공자 및 희생자들이 많이 발생했다. 특히 충주 동락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동락초 김재옥 교사는 감곡면 상평리 출신이며, 최근 이필용 음성군수는 부친인 고 이재국(1991년 작고)씨가 6.25때 초산부대 일원으로 동락전투에 정찰병으로 참여해 포로가 되기도 했었다는 이야기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지난 25일 육군보훈행사에서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고 김영무 씨(6사단 일병. 원통지구전투)와 나라사랑보금자리에 입주한 맹동면 윤덕영 옹(2사단 17연대 중사. 옹진전투.인천상륙작전 참가) 등도 참전영웅으로 기억해야 할 자랑스런 이름들이다.

 

무극전적지에 있는 감우재 전승탑 전경.
무극전적지에 있는 감우재 전승탑 전경.

 

감우재 전승기념관 내부에 전쟁의 참상을 시기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전시물 모습.
감우재 전승기념관 내부에 전쟁의 참상을 시기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전시물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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