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기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의 떠올리는 일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떨리며 웃음이 터져 나온다.

 내가 살던 동네는 지금의 소이면 비산4리 그때의 분구전의 비산리 2구 새말 모퉁이라 불렀고 대장초등학교를 다녔다. 우리 동네와 초등학교는3km 정도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걸어서 학교에 다녔는데 학교를 오가며 많은 추억거리가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하다. 학교 깊은 시멘트로 포장이 되었지만 그때는 도로는 자갈밭으로 울퉁불퉁하게 패이고 차가 지나는 바퀴자국에는 물이 고이고해서 통행에 어려움이 많은 때였다.

 도로를 정비하려면 군청이나 면사무소에서 돈을 주고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동네주민들을 동원해서 길을 정비하곤 했는데 이런 것을 부역이라고 했다. 부역이 많아서 그랬는지 그때의 유행어가 “부역에 땀나면 죽는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부역은 그야말로 하루 사람 숫자만 채우면 된다는 식이었다.

 아무튼, 학교 길은 비포장도로로 검정 고무신을 신고 학교를 다니는데 검정고무신은 어찌나 질기고 질긴지 한번 사서 신으면 밑바닥이 종잇장같이 달아서 고무신에 구멍이 뚫어져야 아버지가 시장에 가서 새 고무신을 사주시는데 새 신을 신은 아이들은 덜떨어진 고무신을 시멘트 바닥이나 돌에 문질러 고무신에 빵구를 내서 새 신을 사달라고 떼쓰는 엉뚱한 아이들도 많이 있었다. 매일 아침에는 아이들이 모여서 학교에 가는 데 규칙적이었다. 동리별로 향우반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향우반별로 맨 앞에는 향우 기를 앞세우고 좌측통행을 하여 등교를 했다.

 옷은 한겨울에도 배따지에 바람이 술술 들어오는 허름한 옷을 입고 다닌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그때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의식주는 해결해도 부러울 것이 없었던 시절인 것 같다.

 동네 아이들은 학교 갈 무렵이면 내가 게을렀는지 아니면 우리 집이 그래도 잘사는 편이였는지 일찍부터 학교에 가자고 우리 집으로 오곤 했는데, 우리 집 뒷방에는 커다란 고구마 한두 개씩 건네주고 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도 친구들 삼삼오오 모여서 개울가나 논둑길에서 개구리도 잡고 하면서 놀다가 온곤 했는데 개구리 뒷다리를 구워서 먹으면 그것이 얼마나 맛이 있었는지 상상을 초월 할 정도다.

 개구리 뒷다리를 나무에 꾀어서 모닥불에 굽다가 대충 익는다 싶으면 그것을 들고 혼자만 먹겠다고 튀던 생각에 웃음이 절로 난다. 지금이야 아이들 간식거리나 먹을거리가 많아서 밥투정 하곤 하지만 그때만 해도 항상 배고프고 간식거리나 구멍가게도 없던 시절이었다. 어는 여름날로 기억되는데 동네에는 하루에 한두 번 엿장수와 아이스께끼(얼음과자) 장사가 오곤 하였다. 엿이나 아이스께끼를 사 먹으려면 돈을 두고 사는 일은 거의 없고 재활용품인 고물을 주고 엿이나 아이스께끼를 사 먹었는데 고물은 주로 헌 고무신이나 빈병 등을 가져다주고 아이스께끼를 사먹었다.

 아이스께끼는 먹고 싶고 고물은 없고 해서 고물을 찾다가 부엌의 찬장에 대 병이 눈에 들어오는데, 보니까 참기름이 하나 가득 들어 있었다. 어찌하랴 참기름을 하수구에 버리고 아이스께끼와 바꾸어 먹고 다음 날 어머니에게 뒈지게 혼났던 일 지금도 그 아이스께끼 먹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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