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진

시장에 나갔다가 길가에 앉은 어떤 할머니가 콩나물 콩을 사라며 무명 자루를 펼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노란 콩을 보니 고향집이 생각난다. 이 때쯤이면 메주를 쑤는 노란 콩을 온 동네가 앞 다투어 수확했다. 내 어릴 적만 해도 기계화가 되지 않아 도리깨질했고 여기저기 굴러버린 콩을 학교에 갔다 오면 줍는 것이 내 일이었다.

온 동네 콩이 거의 수확 될 때쯤 우리는 대접을 한다면 콩을 거두러 다녔다. 우리 마을에 사는 초등학생 50여 명이 모여 졸업하는 6학년을 대접했다. 날을 잡아 저녁 무렵 자루를 들고 집집이 방문을 하고 집 앞에서 “대접 할래요." 하고 말하면 엄마들은 알아서 콩을 한 홉씩 주었다. 그렇게 거두어들인 콩을 팔았다. 그 돈으로 5학년이 주인이 되어 6학년을 위해 선물을 샀고 나머지는 음료수와 과자를 사서 마을회관에 모였다. 저학년은 과자 한 봉지씩 주어서 보내 버리고 4,5,6,학년만 모영 밤늦도록 음료수와 과자를 앞에 놓고 석별의 정을 나누었던 기억이 난다.

그 고귀한 음료수와 과자를 마음껏 먹었던 날도 그날뿐이었다. 대접을 한 날 밤은 조금은 소란스러워도 동네 어른들은 기웃거리지 않았고 우리 세상이었다. 언제부터 내려온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초등학교 6년 동안 메주콩 타작을 할 때면 늘 하던 행사였다. 아마 쌀은 귀한 곡식이었고 때마침 나온 콩은 밭작물이면서 비쌌기에 콩을 거둬 대접한 것 같다.

내가 5학년 때 대접을 하려고 콩을 거둬 팔았다. 그런데 음료수와 과자를 사고 나서 선물을 사야 할 돈을 가지고 있다가 잃어버렸다.

눈앞이 깜깜했다. 이번에는 엄마들 몰래 콩을 조금씩 가져오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다시 모은 콩을 팔아 선물을 샀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달이 높이 떠 환하게 비추고 약간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저녁, 경덕이네 집 뒤에 도둑고양이 마냥 모여 가지고 온 콩을 보자기에 모으던 것이, 그 정이 그립다.

지금 나를 위해 그렇게 해 줄 수 있을까? 단 한명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없을 것 같아 슬프다.

살아오면서 수많은 송별회를 했으나 고향에서의 대접(待接)을 능가하는 송별회를 가져본 적이 없다. 내 기억의 바다에 헤엄쳐 들어가 그 가을밤 과 만나면 명경지수(明鏡止水)가 된다.

나는 가만히 그리운 이름들을 불러본다.

경엽아, 정옥아, 경덕아, 정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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