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훈

아버님께서는 3대독자로서 아들 셋, 딸 셋 우리 6남매를 두셨으며

사랑방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셨고, 안방에는 증조할머니와 아버님, 어머님과 함께 우리 6남매가 생활 하였다.

좁은 생활환경 속에서도 시골장이 열리는 날이면 어머님께서는 장에 갔다 오시는 길에 항상 한손에는 고등어 지반을 다른 한손에는 눈깔사탕을 사가지고 들어오시니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한 개라도 더 먹고자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이곤 했다.

하지만 항상 먹을 것은 큰형님 몫이고 나는 막내라서 어머님이 별도로 챙겨 주시는 것 외에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입에 넣으면 사르르 녹으면 달콤한 맛은 항상 나를 유혹하였으며, 한번은 명절 차례를 준비하느라 하루 종일 불을 때서 만든 엿을 다락방 맨 안쪽에 숨겨 놓았는데 그것을 부모님 몰래 먹고자 살금살금 올라가 손가락으로 찍어먹다가 인기척에 놀라 다락방 문을 닫고 3시간 동안 숨소리도 제대로 못 내고 감금 아님 감금을 당하기도 하였다.

또한 먹을 것이 제대로 없었던 시절이라 학교갔다 오는 길에 시금치 풀 꺾어 먹고 찔롱새순을 꺾어 먹기도 하였으며 논에 물을 대기 위하여 설치한 농로를 막아 가재며 고기를 잡아먹다가 어르신네들한테 혼나기도 하였으며 겨울철 우리 집 점심은 강냉이 죽 아니면 김치죽이 다반사였다.

우리 집은 동네와 좀 떨어진 논 한가운데 있는 독립가옥으로 다른 사람들이 우리 집을 부를 때는 논 가운데 집이라고 불렀으며 우리 집에서부터 큰길까지는 약 300미터의 논두렁길을 걸어야 했고 모든 농사일은 지게질이 필수였으며 방과에는 소을 몰고 풀 뜯으러 나가야 했고 아니면 지게를 지고 꼴을 베로 다녔다.

고구마를 심은 밭 또한 집과 약 1Km정도 떨어져 있어 한번 밭에 갔다 오면 한나절이 그냥 지나가고 했다.

밭은 도랑가에 위치했으며 마사토로 고구마를 심기에는 딱 알맞은 토양이었으면 한번 수확하면 약 30가마니씩 수확하였고 수확한 고구마는 모두 지게로 일일이 져 날라야 했다.

집에 거두어들인 고구마는 안방 윗목에 통가리를 만들고 하늘높이 쌓아 올려 보관하였고 증조할머니께서 긴 공방 대에 담배를 피우시면서 24시간 감시하셨다.

끼니를 때우고자 고구마를 삶고 김칫국을 끓여 나오면 우리 형제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감추느라 정신없었고 잘 익은 고구마를 고구마 통가리위에 생고구마와 같이 섞어서 다른 사람 몰래 숨겨 놓은 다음 혼자서 먹곤 했다.

또한 다른 형제들이 숨겨 놓은 고구마를 찾아서 먹고자 매일같이 보물찾기를 하였고 저녁에 쇠죽을 끊일 때에는 증조할머니 몰래 생고구마를 허리춤에 감추고 나와서 아궁이에 넣어 구워 먹기도 하였다.

찬 겨울 비바람을 맞으면 썰매를 타러 갈 때에는 언제나 증조할머니 몰래 고구마를 가지고 나와서 모닥불에 구워 먹고 젖은 옷을 말리려다 양말을 태워서 집에 가면 어머니한테 혼나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지금은 다 돌아가시고 어머님 홀로 고향을 지키고 있으면 전국 제일을 고구마 생산자로서 매년 고구마 축제를 열고 있으면 축제 때 마다 옛 생각에 코웃음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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