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재 영 전 청주고 교장, 칼럼니스트

 
 

아내의 생일에 부모에게 달려온 자녀들과 손녀들을 바라보니 수구초심(首邱初心), 그리운 게 고향이요, 마음은 고향으로 달려가고 부모님 유택(幽宅)을 지키고 있는 소나무가 떠오르며 부모님께서 사시다 가신 세월이 떠오른다.

내 고향은 음성군 원남면 보천리 393번지, 조부님께선 11대 종손으로 이곳에서 아들로는 둘째인 아버지의 8남매를 낳으시고 이곳에서 키우셨고, 부모님께서는 저희들 7남매를 보천리와 보룡리에서 낳으시고 키우셨으니 우리에게는 소중한 고향이다.

초등학교 6학년때부터 살아온 보룡리 집은 청주와 충주의 중간에 위치하고 시골이지만 집앞에서는 직행버스가 서고 뒤로는 충북선이 지나며 300여m 거리에는 보천역이 자리하고 있고, 집의 우측에는 백마산에서 내려오는 작은 도랑이 흘러 아침에는 이곳에서 세수를 하고 좌측에는 원남지서가 담을 사이에 두고 우리를 지켜주고 있어 시골이지만 생활이 편리하고 마음 편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마을앞 동산에는 조부님께서 난정(蘭亭)이란 정자를 세우시고 일제치하의 암울한 세월을 마음 맞는 8도 유생들과 시작(詩作)을 하시며 보내셨다 하는데 6.25전쟁 후에 정자는 자취를 감추고 어린 시절 동산에서 뛰놀던 기억만 남아있다. 부친께서는 증조부님이 예조참판(陰城郡誌 名官編)을 지내시고, 조부께서는 사천현감(陰城郡誌 節義編) 지내셨다 하나 청빈하게 살아 오셨으니 물려주신 재산이 없어 부모님께서는 맨손으로 출발하시어 7남매를 위하여 공직을 사직하신 후에 밤을 낮 삼아 생활하시며 자수성가 하시어 자식들인 우리는 남들은 조반석죽도 어려운데 편히 살 수 있었다.

글을 쓰다 보니 청주고총동문회 홈페이지에 746회(조회수,21000회), 2002년부터 충북일보에 3년간 매주 2회(火, 木) 246회를, 중부매일에는 아침뜨락 (150회)를 썼고, 음성신문 김재영칼럼 (200회째), 증평괴산저널 김재영칼럼(99회), 90년대부터 가장 많이 기고해온 충청일보에도 김재영칼럼을 연재하며 네 신문에 고정칼럼을 쓰고 있다 보니 여러 곳에 강의를 가게 되면 전직 교장보다는 칼럼니스트로 소개하곤 한다.

내 고향이 음성(雪城)이다보니 호(號)는 설원(雪苑)이 되고, 마을 앞 저 멀리에 백마산(白馬山)이 있어 자(字)는 백붕(白鵬)이 되었고, 고향쪽 3개 신문에도 글을 드리고 있다.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은 부모님의 자식사랑과 따듯한 고향, 모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보니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며 생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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