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장마도 이대로 물러나는 것 같고 걱정했던 태풍 카이탁도 얌전히 비켜가 여간 다행이 아니다.
그동안 충분한 일조량으로 작물생육 상태가 양호해 앞으로 날씨만 잘 하면 올해도 풍년이 예상된다.
새벽녘에 하는 낫질인데도 땀이 비오듯하고 잡초로 덥수룩했던 논두렁을 말끔히 접고 나니 갑갑했던 마음이 다 시원해지는 것 같다.
십여년만에 다시 시작한 농사일이 비록 힘은 들지만 하루가 다르게 곡식들이 크는 새벽들판을 돌아보고, 저녁이면 동네사람들과 농사일을 화두 삼아 대화를 나누니 또 다른 사람 사는 재미를 느끼게 한다.
가끔씩 동네사람들이 부탁하는 행정민원을 대신해 줄 때매다 너무 고마워하는게 고향에 함께 사는 보람을 맛본다.
세월따라 농촌도 많이 변했다. 논갈이며 밭갈이를 하던 듬직한 황소의 모습은 벌써 자취를 감췄고 새참을 머리에 이고 들판으로 향하는 시골 아낙네들의 정겨운 풍경도 이제는 찾아볼 수가 없다.
외형적으론 너무도 많이 변한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시골은 시골이다.
잠시 나무 그늘아래 한가로이 쉬고 있는 농부의 풍경에서 삶의 여유로움을 찾을 수가 있고, 가로등 아래 도란도란 애기 꽃이 피는 여름밤이 시골만의 애틋한 정취를 엿보게 한다.
옛부터 농사를 천하지대본이라 일컬었음은 아주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70년대만 해도 들판 한가운데 농자천하지대본 깃발을 펄럭이며 북소리에 맞춰 벼 이듬매는 농부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깃발 속의 이 말은 농사가 먹고사는 기본적 의미를 넘어서 삶의 모든 근본이란 뜻을 담고 있으며, 그 근원은 흙을 바탕에 두고있다 봐야 할 것이다.
흙은 부드러움의 상징이다. 현대인들은 시멘트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길바닥은 물론이고 살고 있는 집이 그러하다.
특히 도회지 사람들은 야외에 나가기 전에는 흙을 밟을 기회가 별로 없다.
현대인의 마음이 경직되어 감은 온통 딱딱한 시멘트문화에 길들여진 영향 또한 크다 본다.
시멘트 포장을 걷다 논둑이나 밭둑을 걸으면 스폰지 같이 폭신한 부드러운 감촉이 와 닿고, 흙 내음이 온몸으로 퍼져 감을 진하게 느낄 수가 있다.
시골사람들의 마음이 부드러운 것은 바로 그런 흙을 매일 같이 만지면서 살아가기 때문 일게다.
흙의 진리에 의해 생명체를 가꾸는 것이 농사다. 농사란 다른 어느 업종과 달리 일정기간이 지나야만 수확을 할 수가 있다.
모두가 한여름의 더위를 식히기 위해 시원한 곳을 찾을 때도 그들만은 땡볕아래 구슬땀을 흘리며 정성어린 손길로 애지중지 곡식을 가꾼다.
이렇듯 이세상 인간이 만들어 내는 수많은 물질 중에 땀과 정성이 가장 진하게 배어 있는 것이 바로 농부들 손에 의해 생산되는 농산물 일게다.
여기엔 어떠한 타협과 권모술수도 통하지 않으며, 오직 흙의 진리에 따라 흙을 믿고 가꾸는 노력만이 있을 뿐이다.
때로는 홍수, 태풍 등 자연재해로 인해 애써 가꾼 한해농사를 망치기도 한다.
공산품이야 오늘 잘못된 것은 내일 다시 만들면 되지만 망친 농사는 이듬해를 기약해야 되기에 농부들은 오늘의 아픔을 참고 내년 농사철이 오기까지 묵묵히 기다리며 대자연의 순리에 순응한다.
그래서 그들은 추수의 고마움을 하늘에 감사함을 잊지 않는다.
이렇듯 어느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보다도 우리농민들은 한결같이 순박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세상을 순리에 의해 살아갈 줄 안다.
농촌은 나라의 뿌리다.IMF를 겪으면서 온 나라 구석구석이 심한 요동을 쳐도 농촌은 의연하기만 하다.
사회 전 분야에 결쳐 구조조정에 따른 살아 남으려는 몸부림이 지금도 계속 되는 가운데 기업 워크아웃이란 생소한 용어 속에 공적자금을 듬뿍 대주고 있다.
어찌 농촌이라고 힘들지 않겠는가...파산직전에 처한 농가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그러나 그들에겐 기업회생이니 하는 따위의 말들이 딴 세상의 경제논리로만 와 닿을 뿐, 여름내 피땀 흘려 지은 농사가 재값을 받는 것 외 어떠한 욕심이나 불평도 하지 않는다.
이렇듯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흙의 진리대로 살아가는 농촌이 있기에 이 나라가 안정되고 번영하는 것이다.
이제 본격적인 피서철이 시작됐다. 벌써부터 너나 할 것 없이 경주라도 하듯 산과 강, 바다에서 한바탕 북새통을 치고 있다.
모두가 시원한 곳으로 더위를 피해 있는 동안에도 들판 저편엔 검게 그을린 농부들이 오늘도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올 여름엔 농자천하지대본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농민의 마음으로 돌아가 보는 것도 좋은 피서가 되리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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