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선

생선회를 좋아하시는 친정 부모님을 모시고 횟집에 갔다. 저녁시간이라 그런지 손님이 꽤 많아서 한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앞치마를 예쁘게 친 아줌마가 주문도 하기 전에 입가심하라며 차려준 상에는 완두콩과 땅콩, 번데기가 나왔다. 선뜻 손은 안 갔지만 코끝이 찡해온다. 번데기 접시 위에 할아버지 얼굴이 아른 거렸기 때문이다.

친정에서 맏이라는 이유로 귀여움을 많이 받고 자랐다. 특히 할아버지의 사랑은 각별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어미야 주머니 좀 크게 지어다오. 애기 좀 넣고 다니며 보고 싶을 때 보게.”하셨을 정도였다.

어릴 적 기억 한 모퉁이에는 늘 할아버지가 계셨다. 초등학교 1학년으로 기억 되는 그 시절에는 고구마나, 집에서 만든 찐빵이 유일한 간식 거리었다. 가끔씩 과자를 팔러오는 장수도 있었지만 내게 그림의 떡이었다.

그러던 참에 동네에 번데기 장수가 들어왔다. “번데기 뻔! 뻔! 뻔! 번데기!”라고 외치면 동네 아이들이 한꺼번에 몰려나왔다. 번데기 냄새는 침을 흘리기에 충분 했지만 번데기를 사먹는 아이는 없었다.

깔때기 모양의 종이봉지에 번데기가 10원이나 했기 때문이었다. 헌 고무신짝도 받는다는 말에 집에 와 곳곳을 둘러보았지만 신발짝은 구경 할 수도 없었다. 시무룩하게 앉아있는 손녀에게 집에 들어오시던 할아버지가 이유를 물으셨다. 눈물을 글썽이며 번데기 애기를 하는 손녀에게 속주머니에서 10원을 꺼내 주셨다.

단숨에 번데기 장수 앞으로 달려간 나는 자랑스럽게 10원을 내밀며 “번데기 주세여”라고 말했다. 냄새만 맡아도 행복 했었다. 아이들이 침을 삼키며 바라보고 있을 때 개구쟁이 동네 녀석이 빼앗으려고 하다가 먹어보지도 못한 번데기들이 마당으로 흩어져 버렸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아마 그토록 서럽게 울지는 않았을 것이다.

먹을거리가 흔하지 않았던 시절의 애기다.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때의 서러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지금은 땅에 떨어진 10원을 주워가는 아이가 거의 없다고 한다. 그 시절의 10원의 가치는 지금 내 지갑 속에 있는 만원보다 더 소중했었다. 요즘 아이들에게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같은 시대를 살아온 세대들은 공감할 것 같다.

속주머니에 깊이 두었던 쌈짓돈을 선뜻 내주신 할아버지의 사랑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사랑은 조건이 없었던 것 같다.

받기만 했지 보답할 기회도 주지 않고 세상을 뒤로 하신 할아버지는, 유달리 고기를 좋아하셨는데 실컷 드시도록 사드리지 못한 것이 가장 마음 아프다. 먹지 않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느냐는 핀잔에 현실로 돌아왔다. 번데기는 추억 속에 있지만, 영원히 잊혀 지지 않는 특별한 간식으로 내 가슴깊이 남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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