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순

 
 

오늘처럼 하늘이 낮게 내려앉은 날이면 떠오르는 풍경이 있습니다. 작은 시골마을의 복판쯤 되는 곳에 4남매의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빨리 줘”

‘조금만 기다려 봐 오빠, 나 지금 손이 곱아서 짚이 잘 안 집어진단 말이야“.

“너 하기 싫어서 그러는 거지?”

“오빠 미워!”

우리 집은 마을에서 제일로 가난 했습니다 . 그날도 우리 4남매는 동네에서 부자로 소문난 김 씨 아저씨네 삼밭 지붕에 얹을 이엉을 엮고 있습니다. 초겨울의 바람이 아홉 살 계집아이의 손을 그냥 둘리 없습니다. 꽁꽁 언 손을 호호 불며 작은 오빠에게 짚을 집어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내 언 손이 퍼지질 않습니다.

짚을 쥔 손이 추위에 쥐가 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작은 오빠는 동생에게 화만 냅니다. 옆에서 짝을 이루고 이엉을 엮던 큰 오빠와 언니가 제 손을 호호 불며 주물러 줍니다. 그렇게 추위에 떨며 번 돈으로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삼천원이 조금 넘었던 것 같습니다.

1970대 우리네 시골 마을에서는 아이들의 손도 모자랄 정도로 농촌이 바빴던 시대였습니다. 지금이야 기계로 논을 갈고 벼도 심고 베고 하지만 그 때는 하나부터 열까지 사람이 손으로 모든 것을 수확했었지요.

우리 마을은 주로 인삼을 많이 경작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어서 큰 밭은 아니었지만 조그만 밭을 도지로 얻어 인삼을 경작했습니다.

어머니가 남의 집에 일을 가고나면 밭일은 우리 4남매의 몫이 되곤 했습니다.

언니와 오빠들은 밭일도 이력이 나서 그런지 어른의 몫을 거뜬히 해내고도 남습니다. 하지만 저는 나이가 제일 어린 탓에 밭일에는 어설프기만 했습니다. 그래서인가 제가 할 일은 언제나 밥을 짓는 일입니다. 그 때 제 나이 아홉 살이었습니다.

이렇게 어스름이 내리고 눈발이라도 내리는 날이면 이상하게도

풍선에 바람이 들어가듯 서서히 그때의 기억이 내 마음을 꽉 차게 만들곤 합니다.

언니는 나와 여덟 살 차이가 납니다. 언제나 어머니는 남의 집 일에 지쳐 자식들을 돌볼 겨를도 없습니다. 그나마 어머니가 남의 집 일을 해주고 받아 온 품삯은 아버지의 노름 돈으로 나가고 맙니다. 그래서 인가 우리 4남매 중에 제일 맏이인 언니는 초등학교만 나오고 곧장 읍내에 있던 양송이 공장에 취직을 했습니다. 맏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말이 아마도 그 시절 언니들의 모습을 보고 그랬지 않나 싶습니다.

철없던 그 때 언니가 다니던 양송이 공장에서 얻어먹던 양송이 국수는 이태까지 먹어본 국수 중에 제일로 맛났습니다. 속도 모르고 저는 언니가 야근이라도 하는 날이면 공장을 찾아가 까치발을 하고는 창문에 대롱대롱 매달리곤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학교가 파하기 무섭게 집에 돌아오면 먹을 것이라곤 식어서 딱딱하게 굳은 보리밥이 전부였던 그 때 국수는 별식 중에도 별식이었습니다. 언니가 받은 월급은 여닫이문에 다리가 달린 텔레비전과 석유곤로, 전기밥솥으로 변해서 우리 집에 들어왔습니다. 언니 덕에 그때우리 집은 동네에서 몇째 안가는 텔레비전이 있는 집이 되었습니다.

또래 아이들과 놀다가도 방송 시작 시간만 되면 나는 집으로 줄행랑을 칩니다. 내 모습을 부러워하며 바라보고 있을 친구들의 시선이 마냥 좋기만 했습니다. 언니는 큰오빠의 중학교 등록금까지도 책임지는 든든한 살림 밑천입니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언니는 머리숱도 적고 키만 큰 정말이지 제 맘에 들지도 않는 아저씨를 데리고 왔습니다. 언니가 택한 건 그 아저씨가 나온 대학이라고 했습니다. 철부지였던 그때 언니가 싫었습니다. 대학이 뭐 길래 그렇게 못생긴 아저씨하고 결혼을 한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키가 큰 그 아저씨가 나를 보고 웃는 것을 보니 왠지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미안 했던지 남에게 빛까지 얻어 우리 집 형편에도 맞지 않게 많은 혼수를 언니에게 해 주었습니다. 언니가 시집을 가고 나서 우리 집 형편은 더욱 나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상을 다니던 제가 산업체 학교로 옮겨야 한다는 사실이 언니 탓이라며 원망을 하기도 했습니다.

세월은 참 빠릅니다. 우리 집 살림 밑천이었던 언니가 벌써 반백의 고개를 넘었습니다. 얼마 전 언니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좋은 성적으로 졸업도 했습니다.

지난 해 겨울, 서울 사는 언니의 고등학교 졸업식에 어머니를 모시고 갔습니다. 교복을 입고 졸업을 하는 반백의 나이가 되어 버린 딸의 뒷모습에 어머니는 눈물만 하염없이 흘립니다. 그 날 꽃다발 속에 묻혀서 웃고 있던 언니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이제 보닌 언니 옆에서 벙글벙글 웃고 있는 머리숱도 많지 않은 키다리 형부가 정말 멋져 보입니다. 졸업식이 끝나고 우리는 된장찌개를 먹으로 갔습니다.

헌데 제 맞은편에 나란히 앉은 어머니와 언니의 손이 상 밑에서 옥신각신 합니다.

“넣어 둬”.

“엄마, 왜 이러세요. 엄마가 무슨 돈이 있다고 이렇게 큰돈을....”

“내가 너 핵교 댕긴다는 소리 듣구 모아 논겨”

결국 언니는 어머니가 지난 밤 실로 단단히 꿰매 속바지에 꼭꼭 숨겨 가지고 올라 온 백만 원을 받아 들고는 눈시울을 붉히고 맙니다. 그 해 겨울은 어느 해보다 참 따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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