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운경

우리 마을은 중부내륙 고속도로 감곡 IC에서 내려 38번 국도를 따라 제천 방향으로 300m쯤 가다가 남쪽으로 계곡을 끼고 뚫린 2차선으로 1.5Km를 들어와 위치한 산촌(山村)마을이다. 현재는 40여 호에 인구 100여명이 살고 있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남들이 보기엔 70여 년간을 살아오면서 군대생활3년을 제하고는 이곳을 떠나본 일이 없으면 천혜(天惠)의 고장으로 알고 살아온 마을이다.

3년간의 군대생활을 하는 동안도 꿈을 꾸면 고향마을에서의 꿈만 꾸었으며 한시라도 고향 생각을 잊어본 적이 없다.

그 이유로는 어머니의 품속과 같이 따듯한 인심과 훈훈한 정이 넘치는 마을로 전국 어디서도 찾아보지 못할 내가 생각하는 특별한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옛날 어려웠던 시절 우리 마을의 생활상과 인심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일제말기(日帝末期)인 1944년에 내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갑신년 대홍수(甲申年大洪水)가 이 지역에 논밭을 쓸어갈 일이 있다.

이듬해인 1945년 8월 15일, 36년간의 혹독한 일본제국주의 치하에서 해방이 되었으나 우리 마을에서는 수마(水磨)가 할퀴고 간 수해복귀에 지쳐 기뻐할 겨를도 별로 없었다.

해방 후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이북은 공산주의 김일성 체제로 변했으며, 이남은 민주주의 이승만 정부가 들어섰다. 남한에서는 국민의 경제와 국토방위도 미처 추스르기 이전에 1950년 6월25일 전쟁준비에만 몰두해온 북한의 도발로 3년에 동안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전란(戰亂)을 겪게 되었으니 당신 생활의 참상(慘狀)은 상상만 해 봐도 짐작이 갈 것이다.

쌀밥은 조상의 제삿날이나 집안 어른의 생일날이라야 구경할 수 있었으며 주식으로는 보리쌀과 밀, 그것도 늘이어 먹는다고 맷돌에 타서 죽을 쑤어 먹었으며 고구마 감자를 주식으로 먹고 살아왔다.

그것도 없어 초근목피(草根木皮)로 허기진 배를 채우다가 부황에 걸리거나 탈항(脫肛)이 발생하는 비참한 생활을 하며 살아온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가난하게 살면서도 보리 개떡 감자 옥수수를 이웃과 나누면서 살아온 이웃의 정(情)! 정이 있었으며, 이웃집 굴뚝과 연기가 나나 안나나 살펴보며 연기가 나지 않으면 먹을 것이 없어 끼니를 못 챙기고 굶고 있음을 알고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먹을 것을 걷어다 주고 서로 도우며 살아온 우리 마을의 인심!

어려운 형편으로 추수를 못하거나 개와 골이 난 초가지붕에 빗물이 새도 지붕을 잇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마을 사람들이 울력으로 추수를 해주었고 지붕을 이어주는 우리 마을만의 특별한 인심이 있었다.

6.25동란 당시 우리 마을에서는 아군인 국방군에 5명이, 공산군인 의용군에 5명이, 징집되어 갔었다. 9.28수복과 1.4후퇴 등 서로 밀고 밀리는 전쟁에서 아군에 입대한 사람이 2명, 의용군에 징집되어 간 사람이 2명, 모두 4명의 희생자가 생겼다.

서로 총부리를 마주 대고 싸운 입장이었지만 이는 사상과 이념이 다른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에 싸움이지 마을 사람들 간에는 아무 원수관계가 아닌 전쟁이라고 생각하였기에 우리 마을 사람들 간에는 아무런 불미스러운 일이 단 한건도 없었으며 오히려 서로를 위로 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볼 때 이 또한 우리 마을만의 인심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다.

6.25전쟁은 1957년 7월 27일, 3년에 만에 국민들의 많은 사상자를 내고 승산 없이 휴전협정이 이루어졌으며 군사분계선을 복판에 두고 남. 북한으로 분리되고 말았다.

정전이후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정당정치를 한다고 하면서 3년여를 부정선거, 무능정부 등 국정의 혼란으로 국민의 경제는 여전히 어려웠다.

1961년 5.16 군사혁명 이후 재건국민운동과 새마을운동을 범국민적 운동으로 전개하면서 마을의 환경과 농촌의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중농정책을 내놓고 논에는 다수확계 품종인 통일벼를 재배하도록 권장하여 식량증산에 크게 기여토록 하였으며 밭에는 경제작물 비닐멀칭 재배기술 보급으로 농촌경제의 획기적인 발전을 보게 되었다.

한편으로 마을환경개선과 농업선진화를 위하여 마을진입로와 농로확장개설로 기계 영농화에 총력을 기울었으며 지붕개량자금을 지원하여 농촌의 초가지붕을 없앴다.

1970년대 중반에는 모든 동력의 원천인 전기와 전화가 산촌마을에 까지 보급되어 어둡고 배고팠던 시절을 잊어버리게 하였다.

본인은 1962년 재건국민운동 당시, 마을 책임을 맡은 이래 마을의 갖가지 책임을 맡아보고 있다. 내가 이렇게 책임을 맡아온 이유도 마을의 특별한 인심 때문이다.

국도에서 1.7km나 떨어진 산골길에 자전거 하나 제대로 다니지 못하던 진입로를 마을주민자력으로 자동차가 다닐 수 있도록 부지를 받아 넓혔으며, 정부에서 새마을 시멘트를 지원받아 진입로포장을 면내에서 제일 먼저 하였던 일을 생각해봐도 우리 마을의 인심과 단합은 어디다 내 놓아도 손색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제는 개발도상국에서 국가의 경제도 많이 신장되어 마을의 구석구석까지 정부의 지원이 뒤따르고 있어 참으로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마을 주민들은 정부지원에만 연연하지 말고 옛날 어렵게 살아왔던 시절을 생각하면서 각자가 더 열심히 노력하여 살아갈 것과 전통으로 내려오는 마을의 인심과 이웃 간의 정을 계속 유지하면서 마을이 화합하여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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