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숙자 수필가

 
 

삐르릉 삐르릉 새벽의 전령이다. 먼동이 트기가 무섭게 뒷산 숲에서 잠을 잔 맷새들이

무리지어 날아와 노래를 한다. 숨어서 몰래 바라보니 어쩌면 저리도 가벼운 몸짓인가.

조막만한 잿빛 새는 편편한 가지는 제쳐놓고 동곳한 가지 끝에 떨어질 듯 떨어질 듯 앉아서

꽁지를 까불어 대며 무언가 궁리하는 눈치다.

 

먹이를 찾는 걸까, 아니면 친구를 부르는 걸까, 설마 하니 저렇게 높은 가지에 둥지를 틀려고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들깨 알 보다 더 작은 눈에 무엇이 보이는지 나뭇가지를 쪼아 대고 부리를

비벼 씻기도 한다.

 

새들이 저토록 평화로운 것은 자기 것을 고집하지 않기 때문일 게다. 인간들처럼 창고에 쌓아

두려는 욕심이 없어 설 게다. 돼지밥을 주러 가다가 깜짝 놀랐다. 언제 날아 와 있었는지 발치에서

새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갔다. 나를 보고 놀랜 모양이다. 총을 든 것도 아니고 청산가리를 놓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새는 놀라서 돼지우리 지붕 위로 날아올랐다. 그 바람에 우리 밭에 날아와 나부대던

새 떼들이 풍구질한 등겨처럼 날아 솟았다.

 

어떤 새는 내쳐 뒷산까지 또는 하늘 꼭대기로 날아올랐다. 양동이를 든 채로 바라보니 그것은 신비의

율동이다. 얼마쯤 새들이 날아올라 간 하늘 끝을 바라보고 있으니 무한한 창공에 한 점 새의 의식은

텔레파시로 내게 온다.

 

영원과 통하고 말 것 같은 자유.

소멸과도 일직선일 것 같은 찰나.

 

항상 날고 싶어하는 의식은 그래서 유달리 새들을 관찰하고 그 자유로움에 매료되는 모양이다. 역마살

탓인가, 늘 휭하니 떠나고 싶어하는 이 몸살은. 설거지를 하다가도 밭을 매다가도 내향(內向)하는 삶의 안개

숲. 그때마다 햇살로 떠오르는 한 구절이 있다.

 

“생명은 양(量)이 아니라 질(質)이며, 보호가 아닌 자유이고, 의지를 향해 나아가는 것.”

 

그 무렵 인천에 사는 수필가 K여사가 십자매 몇 쌍을 선물로 가져 왔다. 외딴 터에서 같힌 짐승처럼 무양

무양하게 지내는 내가 안타까워 보였던지 그는 먼 길에 새장까지 마련하여 주었다. 두 식구에서 단번에 열 식구로

불어난 것이다. 굵은 철사를 촘촘하게 엮어 맨 정사각형 새장 안에 둥지가 하나 도롱 벌레집처럼 매달려 있고,

가늠대 옆 창살에는 물통과 모이통이 각각 얹혀 있다.

 

새들이 이사를 오고부터 새소리를 들어 달라고 조르는 통에 그이가 번거로워진 것을 빼고는 나의 일과는 훨씬

생기로워졌다. 베란다 위에 새장을 걸어 놓았다. 새벽 먼동과 함께 깨어나 둥지에서 나와 빼이빼이 울기도 하고

어떤 것은 쭈루룩 쭈르르릉 마치 첼로의 현이 울리는 것같이 운다고 한다. 날짐승들도 밤의 어두움이 싫은

모양이다. 산마을이어서 해는 더디게 동산에 오른다.

 

잠을 털고 텃밭에서 배추잎을 뜯어 넣어 주고 모이통 물통을 가셔 내고 새것을 담아 주는 일, 그때마다 조그만

창살문을 들어 올려야 하는데 새들은 틈만 있으면 날아가려 기를 쓰는 통에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다. 십자매들이

이사 온 후로 뜰 앞 사과나무에는 더 많은 멧새들이 깃들었다. 이제 볼긋볼긋 사과는 익어 가기 시작했다.

 

아침을 짓다가 슬며시 내다보니 새장의 십자매나 나뭇가지에 앉은 맷새들이 서로 어울려 저희들 언어로

화답(和答)하는 모습이 재미있어 보인다. 아마 십자매는 바다를 모르는 충청도 멧새에게 인천항 화물선의

고동소리를 들려주려는지 파도 같은 날개짓으로 고동소리를 불어댄다. 그러다가 멧새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한꺼번에 가지를 박차고 비상할라치면 십자매들은 더 요란한 날개짓으로 푸드득거렸다.

 

 

 

 

그날은 비가 내렸다. 비가 내리는 날은 사방이 차분히 가라앉고 먼데 기적소리까지 마음속으로 젖어 든다.

나는 또 우두커니 뜰에 섰다. 나뭇잎새들도 조용히 귀를 열고 빗소리를 듣고 섰는 시각. 기차는 다음 정거장을

향해 뚜우우웅 떠나고 있다. 훨훨 날아가 차에 오르고 싶은 목마름.

 

무심코 내려다본 새장 안에 새들이 조용했다. 새의 깃털이 민감해서 비가 올 것을 미리 안다던가. 새들은 나래를

접고 깊은 사념에 젖었는지 가늠대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새장 문을 열었다. 새 한 마리가 갸우뚱 내다보더니 얼씨구

좋다 하는 듯 포르릉 날아갔다. 또 한 마리, 다시 두 마리, 이렇게 여덟 마리 새 중 여섯 마리가 날아갔다.

 

날아라, 힘껏, 더 높이 더 멀리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 나는 개운했다.

 

어머니는 늘 새가 되고 싶다고 하셨다. 딸 형제로 단산하고 아들 못 낳은 칠거지악의 부덕으로 하여 인종(忍從)의

인두로 스스로를 지지며 60평생을 그늘 속에 잦히셨다. 나도 죽으면 어머니처럼 쌀 쟁반에 미미한 발자국 남겨 놓고

영원으로 날아가 버린 새가 될까. 그리하여 처형보다 더 아픈 이승의 속박에서 풀려나 날갯죽지 아프도록 날아 볼거나.

죽음보다 더 무서운 절망의 벽을 향하여 부서지며 찢기며 도전해 볼거나.

 

비상하는 새의 자유, 자유.

 

저녁나절이 되었다. 비는 그쳤다. 빗물에 씻긴 산과 들이 한결 산뜻해졌다. 저녁 찬거리를 마련하러 채마밭에

나가다가 빨랫줄에 앉은 새들을 만났다. 멧새려니 했다. 가까이 가도 도망가지 않고 앉아 있는 새들은 비를 맞고 날개

쳐져 돌아온 십자매들이었다.

 

쯧쯧, 새들은 넓디넓은 하늘이 무서웠을 거야. 무한정한 자유 앞에 그만 겁이 난 거야. 길들지 않은 날갯짓도 힘겨웠을

테고, 그토록 갈망한 자유가 얼마나 두렵고 고독한 것인가를 알았을 거야. 한 마리씩 움켜 담는 나의 가슴으로 고장난

역마살을 보듯 처절한 비애가 넘실거렸다.

 

나의 아픔은 한 마리의 가시나무새가 되기 위한 몸부림이다. 가장 깊고 날카로운 가시를 찾아 스스로 자기 몸을 찔러

죽어 가며 그 고통을 초월하여 가장 신비하고 아름다운 최상의 노래와 목숨을 맞바꾼다는…….

 

그리하여 나의 영원이 시작되는 날 혼불을 지펴 낸 내 노래가 외로운 영혼의 위안이 되고 목숨이 참 의미가 되기 위해.

더 높이 더 멀리 날아가는 고독한 날갯짓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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