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희

우리 집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내 위로 누님이 두 분, 형님이 두 분, 남동생 이렇게 모두 8식구인 데 나보다 12살 많은 맏이 누님은 삼성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간다며 들뜬 마음으로 부모님 모르게 고등학교 진학원서를 써놓고 나름대로 이것저것 열심히 준비를 한 모양이다.

그러나 당시 집안 형편으로서는 동생들도 줄줄이 있고 해서 도저히 보낼 수가 없어 아버지가 포기를 만류하자 뜻을 굽히지 않아 아버지가 화가 나서 써놓은 고등학교 원서를 찢어 버리셨다는 애기를 내가 자라면서 수없이 들었다.

그 일로 해서 누님은 진학을 포기하고 울며 집을 뛰쳐나가 포천에 있는 병원에 취직해서 간호원이 되었고 몇 년 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서독에 간호원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며 돈을 벌기 위해 서독을 간다고 집에 내려와 부모님에게 애기하고 다시 올라갔다.

그러나 그 당시만 해도 외국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던 시절이기에 부모님은 걱정하는 마음에 가지 말라고 만류하고 계시던 차에 나한데 증조모뻘 되시는 서울 할머니라고 부르던 분이 계셨는데 당시에 전문학교를 졸업했을 정도로 학식과 재력을 겸비한 소위 말해서 신식할머니인데 한번은 시골에 내려오시는 기회가 있어 부모님이 인사를 드리러 갔더니 순주가(큰누님 이름) 서독을 간다는 애기를 들었는데 잘 생각해 보라고 하시며 외국에 나가면 아마 딸 하나 잃어버린다고 각오해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다며 ‘어떻게 해야 할 까’ 로 부모님은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셨다.

그러나 큰 누님은 고집을 꺾을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부모님은 알아서 하라며 마지못해 승낙하고 말았다.

마침내 누님은 69년도에 서독으로 출국했고 함부르크에 있는 규모가 꽤 큰 병원에 근무하게 되었다며 처음 접하는 외국생활상 등을 적어 모서리가 알록달록한 국제우편을 보내왔는데 이후 한 달에 한번 꼴로 꼬박꼬박 보내 왔으며 그럴 때마다 아버지 또한 바뿐 농사일에도 빠뜨리지 않고 저녁에 등잔불 밑에서 답장을 쓰셔서 다음날 내가 학교 갈 때 우체국에 가서 부치라고 우표 값이랑 함께 주셨다.

나는 아버지 책상 위에 보시고 놓아 둔 누님편지를 가끔 훔쳐 읽곤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부모님과 나는 누님의 편지가 오기를 고대하며 기다리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누님의 편지는 항상은 아니지만 거의 서두의 안부내용과 중반부 잘 생활하고 있다는 내용 다음 끝 머리부문에 “적은 돈이지만 몇 마르크 부쳤으니 필요한 데 쓰세요.”라는 글귀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 또한 왜 그리 좋은지 미소를 머금고 동생과 함께 밖으로 뛰어 나가 신나게 친구들이랑 놀곤 했는데 이유는 우리 집에 돈이 생겨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과 적게나마 용돈을 타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돈을 부쳤다는 편지를 받고는 소액환이 등기로 와야만 하므로 그 날 이후로 우체부가 등기 우편물을 가지고 오기만을 며칠씩 손꼽아 기다려야 했는데 고대하던 소액환이 드디어 도착하면 본인이 받았다고 확인하는 아버지 도장을 찍어줘야만 우체부가 등기 물을 건네 줬다.

그 당시에는 국외로부터 부쳐온 소액환은 모두 외한은행 본점 또는 지점에 가야만 환전이 가능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왜냐하면 서독에서 누님이 돈을 부쳐오면 어머니가 항상 평택까지 가셔서 소액환을 바꿔오셨다.

돈 바꾸는 일은 어머니 몫이어서 돈 바꾸러 갈라치면 어머니는 아침부터 일찍 서둘러 옆 동네 대사리까지 1km되는 산길을 넘어 가셔서 완행버스를 타고 일죽, 평택까지 비포장도로를 가셔서 돈을 바꾸시고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돼지고기 또는 생선과 몇몇 생활용품을 사서 다시 돌아 오셨는데 시간은 해가 뉘엿뉘엿 산자락에 걸려 어둠이 몰려올 즈음 도착하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께서는 얼마나 번거롭고 피곤한 하루였을까 출발하실 때는 돈을 만질 수 있다는 기쁜 마음에 가벼운 걸음으로 나섰을 테고 오실 때는 수중에 가족을 위해 쓸 수 있는 돈이 생겼다는 뿌듯한 마음으로 오셨으리라 추측된다.

누님은 이러한 돈 부치기 효행은 내가 대학 다닐 때까지 십 수 연간 계속되었는데 그 덕분으로 둘째형, 나, 그리고 동생 등 우리 3형제가 대학을 다닐 수 있었으며 집안 형편도 나아져 동네에서 첫 번째 또는 두 번째 정도로 텔레비전이나 경운기, 전화기 등을 장만할 수 있었으므로 친구들로부터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누님이 서독 간다고 했을 때 서울 할머니께서 부모님한테 딸을 외국 보내면 자식 하나 잃어버린다고 하신대로 어머님이 83년도에 돌아가셨을 때도 그렇고 93년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장례식에 조차 참석하지 못하고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잠시 귀국해 묘소에 가서 서럽게 울던 누님의 모습이 지금도 아련하게 생각난다.

올해로 63세가 된 누님이 2007년도에 잠시 귀국해 지난 이야기를 하며 부모님을 위해 가까이서 자식도리를 다하지 못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고 해서 우리 형제들이 “어렵던 시절 부모님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었으므로 효도를 다했다.”고 위로는 했지만 돌이켜 보면 돈이 인생의 전부인가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려웠던 60~70년대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누님이 외국인 근로자였던 나로서는 요즘 우리 주변에 많이 볼 수 있는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마음이 남다르다.

내가 어렸을 때 누님이 돈을 보냈다고 쓴 편지를 반가운 마음으로 읽던 모습을 회상하며 우리나라에 돈 벌어 와서 생활하는 외국인 근로자 가족들 또한 돈 벌기위해 한국에 간 아버지, 어머니 또는 누나, 형으로부터 돈을 보냈다는 연락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경험자로서 잘 알고 있다.

이러한 마음에 매스컴에서 외국인 근로자를 학대했다거나 임금을 주지 않고 고의로 부도를 내고 잠적했다는 소식을 접할 때면 마음 한켠이 쓰라려 온다.

나는 누님으로부터 서독에서 간호원으로 근무하면서 부당한 대우나 인격적 모욕을 받았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고 오히려 자국민 못지않게 인간적으로 대우해 준다는 말을 수없이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때마다 선진국과의 차이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 라는 생각을 많이 해왔다.

나는 지금도 서독 간호원 근로자의 동생으로서 60~70년대 산업 역군으로 이억 만 리 낮선 이국땅까지 돈 벌기 위해 고된 일에 지친 몸을 이끌면서도 내 가족, 내 나라를 위해 열심히 우리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데 일조한 서독 간호원, 광부 그 외 이주 한국인들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우리 누님이 서독 간호원 이였다는 시실에 긍지를 갖는다.

 

저작권자 © 음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