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종 렬 전 음성교육장

 

 
 

아빠는 외롭다. 대부분 그렇다.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멀고 어색한 존재, 그것이 아빠다. 아빠는 과거에도 외로웠고 현재도 외롭지만 과거 유교윤리가 보장한 가부장이라는 후광이라도 있었던 시절, 아버지는 적어도 초라해 보이지는 않았다.

엄마가 있어 좋다/ 나를 예뻐해 주어서/ 냉장고가 있어서 좋다/ 나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강아지가 있어서 좋다/ 나랑 놀아 주어서/ 그런데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어느 시골 초등학교 백일장에서 나온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란 제목의 글이다.

몸이 으슬으슬한 게 몸살이라도 난듯하여 큰 맘 먹고 회사에 조퇴를 하고 집에 돌아온 아버지. 부인은 친구 모임에라도 나갔는지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감기몸살 약을 찾아먹고는 거실소파에 누웠다. 그러기를 한 시간여. 학교를 마친 중학생 아들이 열쇠로 문을 열고서는 집에 들어섰다. “엄마, 엄마”하고 몇 번 불러보더니 인기척이 없자 소파에 누워있는 아빠를 본체만체 집을 한 바퀴 돌아보고는 한마디 한다.

“어, 아무도 없네.” 웃을 수만은 없는 이 서글픈 유머는 오늘날 가정에서 ‘아버지의 부재’를 단면적으로 보여준다. 아버지의 부재는 말 그대로 아버지의 권위가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모 기업에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가족과 함께하는 즐거운 하루’라는 주제로 그림공모전을 열었다. 그러나 출품된 대부분의 그림에서 아버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아버지는 소파에 누워 혼자 TV를 보고 있거나 술에 취해 자고 있는 모습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미국 링컨대학교 학생 5만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68%의 학생들이 TV와 아버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다면 TV를 고르겠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OECD가 발표한 ‘2015 삶의 질’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아빠와 아이의 교감 시간은 하루 6분이라고 한다. 가족은 있지만 아버지의 자리가 없다. 슬픈 얘기다.

과거 우리 아버지들은 그저 늘 근엄하고 자식들 뒤를 지켜준 든든한 병풍 같은 분이었다. 이른바 ‘아버지의 자리’라는 게 있었다. 온돌문화로 말하자면 아랫목은 아버지만의 공간이었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 아버지들의 자리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존재가 결코 아니다. 좋은 아버지는 돈만 많이 벌어다 주는 아버지가 아니요, 권력이 있는 아버지도 아니다.

심리학자 프로이드는 “내가 어린 시절 가장 원했던 것은 아버지의 보호막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만큼 가정에서 아버지의 위치는 중요하다. 어머니의 사랑이 향기로운 꽃이라면 아버지의 사랑은 넉넉한 그늘을 드리는 거목과도 같은 것이다.

아버지는 그들의 자녀에게 사회적 지위나 업적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이룬 것 하나 없는 초라한 아버지도 그의 자녀에게는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모든 명예와 부를 지닌 아버지도 그의 자녀에게 혈연 이상의 의미를 주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 사회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아이들을 책임질 가장은 아버지들이다. 아이들에게 아버지는 세상을 향한 푸른 신호등이 되어 주어야 한다. 우리 아버지들이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아버지의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우리 모두 관심을 기울여야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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