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희

깊은 밤 어디선가 물결치는 소리가 들린다. 책상 위에 장식품으로 갖다 놓은 나무토막의, 나이테를 타고 흐르는 선율이다.나무가 처음 뿌리박았을 때의 모습을 그려 본다. 햇살 바른 양지 뜸, 혹은 가파른 골짜기 어디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 점 씨앗으로 떨어져 잎이 늘고 가지가 뻗어가면서,바람과 흙의 아들로 커 왔을 것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그늘을 넓히고 하늘을 일궈 오다가 어느 날 나무꾼의 손에 잘려졌겠지. 그런데도 유감스러운 기색이 없다. 지도에도 없을 것 같은 꿈의 반경이 오히려 아름답기만 하다.바퀴살 모양의 테에서는, 뿌려진 대로 살아 온 우직함이 보인다.악조건이 있었다 해도, 자기 성장의 기틀로 삼아 왔을 것이다.

일생을 진실 되게 살아 온 이의 참모습이 그런 거라면, 나이테야말로 나무의 삶을 총결산하는 것이리라. 갑자기 지나 온 길을 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무처럼 잘리고 난 다음은 아니래도, 중간 결산쯤은 될 것 같아서였다. 나무와 같은 존재라면 이미 오십 개 남짓 새겨지지 않았을까. 나이테가 줄기를 잘라 낸 횡단면에 조각되었다면, 나의 그것은 어디에 그어졌을지도 궁금했다.

우선 이마의 주름을 생각했으나, 밖으로 드러난 것을 보면 생소한 기분이다. 더욱이 잘리고 나야만 보이는 나이테를 생각하면, 우리의 그것도 몸속 어딘가에 있을 것 같다. 나이테가 만들어지는 경로를 새삼 돌아본다. 우리가 새해 첫날에 1년의 계획을 세우듯, 나무도 이른 봄에 테 모양의 윤곽을 새기지 않았을까. 적당한 구도로 화폭을 설정한 뒤, 칸칸이 다른 모양새를 채운다.

다음에는 모나거나 이지러지지 않도록 둥글리면서 폭을 늘린다. 밑그림을 그리고 색칠을 해서 완성하듯, 자기만의 세계를 펼친다. 더도 덜도 없이 살아온 그대로 새겨진다고나 할까. 아주 힘들 때는 옹이가 박혔을 것이다. 바람에 시달리면서도 여전히 꿈을 새겨 나갔을 테지. 어느 날은 벌레가 먹고 구멍이 뚫리거나 하면서, 빛깔도 엷어졌을 것 같다. 저렇게까지 감춰 둔 속내를 생각하다 보니, 얼핏 툭 불거진 부분이 눈에 띄었다.

다른 곳보다 유달리 칙칙해 보인다. 정하게 똑 고른 무늬보다, 마디와 옹이로 뒤틀린 그것은 확실히 다른 느낌이다. 쾌적하고 알맞은 여건과, 가물지 않으면 비가 오고 혹은 태풍이 지나갔을 그 간의 곡절을 말해 주는 것 같다.

내가 나무라면 어떻게 했을까. 모르기는 해도 언제나 좋은 자리를 넘보며 살았을 것 같다. 흐리기만 해도 짜증을 내고, 추우면 움츠렸을 게 뻔하다. 따습고 혹은 서늘한 가운데 생기는 것을 잊고, 순조로운 날들만 추구해 왔다. 비바람에 꺾이면서 아물고 옹이가 되는 그게, 나무의 연륜인데 말이다.밖으로 뻗은 모양인가 하면, 죄어든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몸속에 길을 내면서 해마다 한 번씩 자신을 돌아보는 모습이다. 그렇게 자신을 키우기는 해도, 스스로 평가되지 않는 한계는 있을 것 같다. 자기가 볼 수 없는 것 때문에 훨씬 절박한 느낌이 든다.하기야 그래서 더 부단한 정진을 요하는 게 아닐까.

물이 오르내릴 때 생기는 나이테와, 우리들 감정의 기복으로 형성되는 그것도 결국에는 같은 맥락인 셈이다. 과녁판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격수가 오로지 정점에 집착하듯이, 우리도 언제나 자기의 그것을 주시하면서 산다.

그런 중에도 빗나가는 게 더 많은, 시행착오의 날들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맞추기가 수월하지만, 갈수록 촘촘해지는 과녁은 용이한 게 아니다. 명중률이 높아진다 해도, 과녁은 그만큼 까다로워지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 가운데 자기만의 연륜이 돋보이는 데서, 나무와 우리들 삶의 공통점이 드러나는 것이다.

나이테의 시작이 중심인 것처럼, 우리들 가치 의식도 진즉에 결정된 것으로 본다. 과녁이 멀어지면서 시작의 개념이 흐려지듯, 지침으로 삼아온 것도 퇴색해 간다. 그러다 보니 원초적인 본질에서 벗어난 일도 많았다.

그렇게 맞추든 빗나가든 오로지 자기의 목표를 향해 살을 날리는 것 또한 우리들 삶이다. 나무가 비바람에 대한 적응력을 키우면서 자라듯,가치관의 정립으로 허점을 보완한다.나이테가 하나씩 분리되어 있다면,

우리의 그것은 연결 부분이 없는 나선형으로 생각하고 싶다. 처음을 정점으로 시작되는 데서, 마침표를 정할 수 없는 무한의 영역이 그려진다. 나이테가 만들어지는 봄가을이 유난히 짧은 것만 보아도, 기쁨은 잠깐인 것 같다.

그 시점도 여름과 겨울 다음인 것을 보면, 평온한 날조차 역경을 이겨낸 다음의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르지 못한 날씨를 극복하는 게 나무의 몫인 것처럼, 우여곡절에 단련되는 것 또한 자기 몫이라는 뜻이다. 나무는 나이테를 의식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지만, 더 큰 이유라면 연륜에 부끄럽지 않기를 바라는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사계절이 뚜렷해야만 생기듯, 우리들 나이테도 희비애락의 교차점에서 만들어진다.

똑같은 삶이라도 저마다의 연륜은 있다고 본다. 잘리지 않는 한 새겨지는 것은 또 얼마만한 축복인가. 일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그어지는 것 때문에 단 하루도 허술히 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금 나이테를 본다. 동심원의 무늬에서, 오래 전 얘기가 들리는 것 같다.

계절과 날씨 등의 여건으로 좌우되는 데서, 복잡다단한 양상으로 그어질 일생의 그것을 생각했다. 나이테가 나무의 증인으로 남듯이, 내 삶의 표본이 될 것 때문에도 깊이를 더해 가는 삶으로 바꾸고 싶다. 엄연한 삶의 기록인 것을 생각하면 아무렇게나 새길 수 없음이다.앞으로도 나는 계속 나이테를 새길 것이다.

수레바퀴의 테를 늘리면서, 자신의 역량을 시험해 보고 싶다. 일 년을 기점으로 생기는 것보다, 아무렇게나 쌓이지 않는 연륜이 더 유다른 느낌이다. 나이와 함께 늘어 간다고 해도, 정신적 연령대에 미치지 못하면 다만 겉치레일 뿐이다. 가치관이나 지표로 바뀌는 삶이라면, 좀 더 미래 지향적인 길을 가리라는 다짐을 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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