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숙자 수필가

 
 

처서가 지나면 건들마는 간단없이 한 차례씩 지나간다.

이맘때 쯤이면 나무들은 물걷기를 시작하면서 조금씩 잎을 태워

동면을 준비한다.

아마 그때 쯤이었나 보다.

그이는 밤마다 사과밭으로 나갔다. 할일없이 나무사이를 오가기도 하고

몽유병자처럼 암흑가운데 우뚝 서서 삼경을 보내기도 했다.

전국 어느곳엘 가봐도 울타리 없는 과수원은 이곳 음성 밖에 없다던

과수원 마을에 올 가을부터 수령 십년, 이십년이 넘는 사과나무를 캐는 작업이 한창이다.

비싼 소독약 뿌리고 비싼비료주어 일년농사 지어봐야 생산비 건지기도 힘드니 공들여

키워온 나무를 베어버리는 그들의 심중을 알고도 남는다.

서리가 하얗게 나리던 밤이었다.

잠이 안온다고 담배만 피우던 그이가 "임자 자나?"

잠결에 들려온 그의 목소리가 푹 가라앉아 있었다.

"임자, 과수원 하기도 힘들지? 몸도 약하고 소독약 중독돼 얼굴붓고......."

혼자 중얼거리는 그이의 저의를 직감할 수 있었다.

"그냥 둬요. 이십년이나 길렀어요. 자식 기르듯이."

그이는 망연히 담배연기만 날리고 있더니,

"이렇게 가다가는 자식놈 둘 대학공부 못마쳐."

한마디 내뱉고는 휑하니 밖으로 나갔다, 다른 공산품은 원자재 값이다.

가공료다 하고 가격 현실화를 했건만,농산품이 마치 맹물 먹고 자라는

콩나물로 아는지 제자리 걸음이다.

농민은 고독하다.

혈기있고 교육받은 젊은이는 도시로 빠져나가고 남은 것은 텅빈집과

노인과 부녀자 뿐이다. 어디 살기 힘든 곳이 농촌뿐이랴.

하지만 국민 전체의 식생활을 담당하고 있는 농촌이기 때문에 그 심각성은

농촌에 한한 것만이 아닌 국민 전체의 것이 아닐까.

스무하루 그름 달빛이 창으로 비쳐들고 있다.

이따금 바람이 지나는지 앙상한 사과나무 가지가 창문을 두드린다.

서울에서 공직에 있던 그이가 과수원이 좋다고 고향으로 내려온지도 사반세기가 흘렀다.

삼십대 초의 장년이 이제 미명의 황혼길에 서서

어느덧 자신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로 변신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 순간,

한 치도 숨돌릴 수 없는 급박한 현실에 밤다다 몸으로 우는 그의 아픔을 나는 안다.

그이가 좋아한 이상으로 나도 사과나무를 좋아했다.

가지마다 화사한 요정을 달고 섰는 봄 나무가 좋고 짙푸른 생명력으로 주어진 생을

열성껏 살고 있는 여름나무도 좋치만 인고의 결실로 탐스러운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섰는

가을나무는 충만한 은혜로움으로 우리의 영혼을 살찌게 해 더욱 좋다.

그러나 더더욱 좋은 것은 모두를 돌려보내고 살을 가르는 동천에

빈손으로 서서 묵묵히 사색하는 겨울나무는 나의 스승이요 벗이요 연인이었다.

검지 손가락같은 묘목을 심은게 엊그제 같은데 두팔 안에 뿌듯이 안겨오는 나무의 몸매,

그안에 우리의 생활이 연륜으로 무늬져 있다.

방문을 열고 뜰에 내려서니 달빛이 시리도록 천지가 적요하다.

그이는 온데간데 없고 어디선지 부엉이 울음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린다.

한기에 팔장을 끼고 큰밭으로 주춤주춤 가보니 사과나무 둥치를 껴안고 울고 섰는 그이.

"으흐흐 으흐흐"

나무를 껴안다 두드리다 얼굴을 비비며 흐느끼는 그이, 나무뒤에 숨어 서서

하늘을 바라보니 잎지는 가을밤 그 스산함이여.

천지가 백설로 뒤덮인 겨울에도 그이는 사과나무 전정작업이 가장 행복한 하루라고 했다.

침묵속에 더욱 가까이 들리는 신의 음성을 들으며 찰그락 찰그락 순을 치다보면

어느새 가슴으로 시냇물이 도올돌 흐르고 꽃망을 트는 소리가 귓가에 와 맴돈다고 했다.

깊게 잠든 삼라만상을 바람이 두르러 깨우은 3월이 오면 우리는

사과나무 등피를 긁어주는 작업에 빠졌다.

월동한 병충알, 때묻은 표피를 벅벅 긁어주다 보면 짐스러운 체면, 탐욕의 인간사도 가끔은

사과나무처럼 말끔히 긁어내 태워버리고 싶어진다.

보숭보숭한 솜털을 두르고 겨울을 나는 꽃눈의 지혜 또한 놀라웁고 다투어

꽃피고 잎피는 그 순리 얼마나 기묘한가? 흰듯 발그레한 연연한 꽃이파리.

봉오리마다 은은히 피어오르는 순백의 향연, 눈물인듯 감격인듯 달밤을 휘드르며 퍼내는향내,

그 향기에 질식사해도 후회없겠다던 봄밤, 우리는 이 과원을 가꾸며 창조주의 크신 사랑을

터득했으며 흙손 속에 짚이는 솔직한 땀의 응답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정다산 선생께서는 일찌기 농사가 다른 일보다 못한 이유를 대우가 선비들만 못하고

이익이 상업만 못하고 편안하기가 공업만 못하다고 실토하셨다.

그러나 우직한 믿음과 속임수 모르는 순수한 삶이 그 어느 인생보다 값지고 보람있다고 자부해 왔다.

사과나무를 대하는 그이의 눈빛은 자손을 대하는 어진 어버이의 그것이었다.

어떤 나무에는 부란병의 고질이 있어 해마다 수술하고 응애가 붙어 가려워 하는 나뭇잎,

배가 고파 허기진 가지, 갈증에 허덕이며 타는 입술, 탄저가 도려내는 사과의 신음소리까지도

알아내어 치료해 주는 열렬한 사이로 살아왔다.

"모두가 고향을 버리고 떠나더라도 우리는 여기서 살다가 여기에 묻힙시다."

나무밑 잡초를 뽑아주다가 무심히 던진 그 한마디가 내 깊은 심령의 골짜기 까지 울려온다.

"감기 들어요, 들어가요."

그이는 흠짓 놀라며 소매깃으로 눈물을 닦았다.

"내일부터 사과나무를 캐야겠어. 그런 줄 알어."

퉁명스럽게 내뱉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달빛이 비껴내린 알몸의 사과나무도 하얀 눈물을 뜨겁게 뜨겁게 쏟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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