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숙

김장을 하지 못했다. 11월의 마지막 주가 시작 되었지만 아직도 김장을 못 하고 있다. 밤 기온이 내려가 혹여 배추가 얼기라도 할까 걱정이 되어 비닐을 덮었다 걷었다만 이주일 째 반복하고 있다. 각기 흩어져 살고 있는 시누이들과 아이들의 시간을 맞추다 보니 매번 늦은 김장을 하게 된다.

몇 십 년째 하는 김장이지만 번번이 다른 집 보다 늦다. 회사에 다닐 때는 격주 따지다가 늦기도 했다. 이제는 회사에 다니지도 않는데, 늦게 하던 습관인지 아니면 게으른 탓인지 또 늦는다.

어릴 때 김장 하던 때가 그립다. 옆에서 배추 속을 뜯어 먹기만 해서 그럴까? 김장이 퍽 쉬워 보였다. 마당의 양 옆으로 배추밭과 무밭이 있다. 오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고향집의 모습은 살고 있는 것처럼 언제나 생생하다. 새파란 배추와 무 잎이 출렁 거린다. 지금처럼 속이 꽉 찬 배추는 아니었지만 할머니의 사랑과 정성으로 키운 배추는 꽤 통이 찬 배추였다.

무는 배추보다 일찍 뽑는다. 깍두기 해놓고. 배추 속거리 남겨두고 뜰에서 가까운 곳에 오빠는 구덩이를 판다. 나의 키 반 정도로 깊이 파고서 할머니와 세 식구는 무를 나르면서 차곡차곡 거꾸로 쌓고, 굵은 나무로 얼기설기 엮은 다음 수시로 무를 꺼낼 수 있게 입구를 만들어 문을 만들고, 짚으로 덮어 그 위에 작은 무덤만큼 흙을 얹어 둥글게 만든다.

며칠만큼 무를 꺼내야 하는 것이 담당이 되어버린 나는 싫었다. 눈이라도 쌓이면 손이 시려워 싫었고, 구덩이가 깊어 칼끝이 닿지 않으면 나의 엉덩이는 하늘로 쳐들리고 컴컴한 굴속을 더듬어야 했다. 겨우내 꺼내다 무밥도 지어먹고, 깨끗하게 씻어다 놓으면 밤으로 간식대용으로 껍질을 벗기어 먹기도 한다. 무를 먹고 난 뒤에 꼭 따라오는 것이 있다. 크억! 무를 먹을 때는 맛이 있지만 트림을 피해 갈 수 없는 고약한 냄새 또한 아름다운 그리움을 남긴다.

김장철이 되면 오빠는 장독대 옆에 땅을 파고 항아리 두 개를 묻어둔다. 할머니는 배추를 뽑아 다듬어 미지근하게 물을 데워 소금물을 풀어가면서 배추를 절인다. 배추를 뽑을 때 빠지지 않는 간식거리가 있다. 배추 꼬랑지! 단단하지만 고소하고 달달하다. 몇 개씩 다듬어 두면 추운 겨울밤, 이불 속에서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간식꺼리다. 지금도 배추를 뽑을 때면 어린 시절 배추 꼬랑지 먹던 시절이 떠오른다.

잘 절여진 배추는 발을 단 지게에 담아 오빠의 등에 업혀 개울로 간다. 동네 아주머니 몇 분이 와서 맑고 차가운 물속에서 몇 번 흔들어 주면 깨끗하게 목욕을 한다. 사실 나는 친구들과 배추 속 뜯어 먹는 재미로 개울까지 따라간다. 엄마들이 배추 씻으러 개울에 가면 추운 줄도 모르고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가서 배추 속을 뜯어 먹곤 했다. 고향의 개울은 지금도 공장이 없어 깨끗하지만 그때는 모두 개울에 가서 김장배추를 씻었다. 개울물이라 더럽다는 생각은 해 본적이 없다. 목마르면 언제나 두 손을 모아 떠 마시던 물이었다.

 

큰항아리에는 배추김치, 작은 항아리에는 깍두기가 가득이다. 총각김치라는 것은 있는 줄도 몰랐다. 이제와 느끼지만 할머니가 귀찮아서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칠십에 가까운 할머니와 이십대가 채 안된 오빠. 열댓 살도 못 된 계집아이였으니 먹으면 얼마나 먹었을까. 비록 한 항아리밖에 되지 않는 김치였지만, 우리 세 식구의 새봄이 올 때까지 맛있는 반찬이 되어 주었다.

가끔은 배추김치 사이사이 박았던 무를 어석어석 깨물어 먹고 싶다. 김장이 끝나면 할머니와 오빠는 막대기 네 개를 세우고 엮어 놓은 영으로 돌려가면서 움막을 만든다. 항아리에 눈도 쌓이지 말고, 먼지도 앉지 말고, 김치가 싱싱하게 익어가기를 바라는 김치집이다.

지금은 텔레비전에서 무가 만병통치약이라고 할 만큼 건강에 좋단다. 그러고 보면 옛날 조상님들은 모두 현명 했던 것 같다. 생활하는 주변에서 모든 것을 해결했다. 무 농약으로 건강을 지켰고, 들판에 늘려 있는 잡초로 병을 이겨 냈다. 그 잡초들이 지금은 약초로 변해 찌든 현대인들의 건강을 지켜주고 있다.

무를 씻었다. 주말에 김장을 하기위해 한 가지씩 준비를 한다. 마늘과 생강은 까서 사나흘 밤마다 조그만 절구에 찧어 놓았다. 쪽파도 깨끗하게 다듬었다. 찹쌀죽도 쑤어야지. 시누이들이 젓갈은 두어 가지 사오겠지? 해마다 하는 김장 이지만 하기도 어렵고 힘도 든다. 하지만 식성이 다른 가족들도 어울려 하는 시간은 즐겁고 행복하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돈이 많은 사람 없는 사람도 김장은 해야 추운 겨울을 날 수 있다. 여러 가지 양념이 모여 배추와 같이 숙성이 되면 맛있는 김치가 되듯이 올 겨울에도 추운 사람 없이 모두 따뜻한 겨울이 되었으면 좋겠다.

올해는 무 농사를 잘 지었다. 들기 힘이 들 정도로 무가 굵다. 지금은 김치 냉장고가 있어 추운 날 밖으로 김치 꺼내러 가지 않아도 되어 좋다. 그래도 커다란 항아리 속에서 서너 달 푹 숙성된 김치가 먹고 싶다. 며칠 전 땅속의 항아리 김치 생각이 나서 김치 항아리 하나 묻을까하고 슬쩍 남편에게 말을 건넸더니 김치 냉장고 핑계를 대고 귀찮아한다. 여러 가지 양념이 모여 한 항아리에서 숙성된 김치의 맛을 모르지는 않겠지만 싫다고 한다.

지난 추석 무렵 중국에서 육년 여 살던 아들이 가족을 데리고 나왔다. 중국의 문화와 우리의 문화가 달라 고부간의 갈등이 심하다. 서로 다른 사람이 모였지만 여러 가지 김치양념이 모여 숙성이 되듯이 시간이 흐르면 우리 식구들도 숙성이 되어 가족의 화합이 잘 되기만을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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