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숙자 수필가

사흘이나 제사 밥을 먹었다. 재작년 이맘때다. 제수를 차려놓고 작은 집 가족을 기다리는데 아무도 오지 않고 연락도 없었다. 남편은 모두들 정신이 해이해졌다고 혼자말로 동생들을 나무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서 메모장을 가져와 확인했더

니 할머니 기일이 아니라 생신인 것을 잘못 표시해 둔 거였다. 완벽하던 남편이 나이가 들어서인가 실수를 하다니... 우리 부부는 질리도록 제사 음식을 먹어야 했다.

오늘은 어머님 기일이다. 늘 해오던 일인데 태산이 눈앞에 있는 것 같다. 여태 힘든 줄 모르고 제사를 모셨는데 얼마 전 대상포진을 앓고 나서부터는 모든 일이 성가시고 의욕이 없다. 남들은 쉬운 말로 제사를 줄여 살아 있는 사람이 편하게 지내라고 하지만 안동 김씨 대사성공파 문온공 후손으로서는 언감생심(焉敢生心) 감히 그런 마음을 가져볼 수조차 없다.

효를 인간 본연의 제일 우선으로 꼽는 남편은 다섯 살 때부터 사랑채에서 할아버님과 식사를 하고 잠도 함께 잤다고 한다. 사람의 기본 됨됨이와 인성은 할아버님의 밥상머리 교육에서였다고 한다. 할아버님께서 쓰신 글을 본적이 있다. 세필로 쓴 글씨가 인쇄한 것처럼 굵기와 크기가 일정한 게 달필이었다.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청렴결백한 선비정신과 함축된 인품이 느껴졌다. 그런 어른과 함께 했으니 남편도 선비기질을 닮아 꼿꼿하기 이를 데 없다.

제사를 받드는 일에 조금의 소홀함만 있어도 집안이 시끄러워진다. 남편은 해가 바뀌고 새 달력이 나오면 일 년 동안 지낼 제사와 집안 행사의 날짜를 달력에 적어둔다.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처럼 보여 나를 긴장하게 한다.

남편과 나는 햇것이 날 때면 일 년 치 제물을 준비한다. 고사리는 물론 지리산 산청에서 떫은 감을 사다가 깎아 말려 곶감을 만든다. 청도 대추, 공주 밤, 진부령 황태. 전국을 다니며 좋은 제물을 장만한다. 그것도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계신 조상님 면전에 올리듯이, 우리 뿐 아니라 시동생들도 어딜 가던지 좋은 것이 있으면 마련해 두었다가 가지고 온다.

어머님 생전에 우리는 부산에서 살았다. 기일이 다가오면 하루 전에 어머님 댁으로 가서 어머님과 함께 장을 보고 갈무리 해 두었던 음식재료들을 챙겼다. 시골집은 광이 따로 있어서 재료와 제기를 보관하기에 편했다. 지금 나는 아파트에 산다. 아파트에서는 제기들과 재료를 건사하기가 쉽지 않다. 선반에 매달아 놓고 살다보니 제물을 머리에 이고 사는 것 같다.

 

예전에는 밤 11시 지나 1시 사이에 제사를 지냈다. 돌아가신 날의 첫 시각에 지내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온 마을이 깊은 잠에 든 시각, 환하게 불 밝히고 도란도란 제수를 준비하는 모습은 한밤에 피는 꽃처럼 은근하고 정성스러웠다. 직계가족뿐만 아니라 친척들도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조용히 모여들었다. 또한 제사를 지내고는 음식을 나누며 자근자근 서로의 안부를 텄다. 어머님은 돌아가는 친척들에게 봉송을 건네기도 했다. 근래에는 늦은 저녁 시간에 지낸다. 바쁜 생활이기도 하지만 핵가족이 되면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이튿날 생업에 종사하기 위해서다.

제사를 모시는 일은 우리 조상들이 최고로 치는 효의 하나다. 당연하게 생각한 우리들은 조상 받드는 일에 정성을 다하는 걸로 알고 커왔다. 그러나 요즘 젊은 사람들은 제사 모시는 것을 힘들게 생각한다. 명절 증후군 때문에 갈등이 생겨 이혼하는 부부가 많다고 하지 않는가.

봉제사는 촛불을 밝히고 향을 피우며 일가친척들이 모여 조상을 기리고 우애를 다지는 행사다. 한 지붕 밑에 살지 못하다보니 늘 누군가는 참여하지 못한다. 오랜만에 만난 형제들과 소원해지려는 마음을 풀어 도타운 정을 나누라는 뜻이 아닐까. 조상을 섬기는 일도 중요하지만 남아있는 후손들의 화목을 위해서도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 같다. 부모님이 생존해 계시면 생신을 빌미로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지만 돌아가셨을 경우에는 같은 하늘밑에 살아도 좀처럼 만나기기가 어렵다. 더구나 요즘은 제사 음식을 배달시키고 여행지에서 간단하게 모시는 일도 다반사라니 변하는 세태에 어리둥절하다.

조상님들의 지혜는 문명의 발달로 날로 변해가는 요즘에도 배워야 할 부분이 많다. 나는 뵌 적도 없는 분이지만 글씨 하나로 인품과 덕을 느낄 수 있듯이 조상들의 지혜를 배워나가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닐까싶다. 그럼에도 이 봉제사는 우리 대에서 끝날지도 모른다. 요즘 젊은 여성들이 층층시하 고인들의 제사를 지내기에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도 크려니와 부부가 생활전선에서 뛰어야 하는데 어떻게 일 년이면 열 번 가까운 제사를 모시라 하겠는가.

내 몸 아픈 것은 뒷전이고 괴로운 것도 속으로 감추며 제수 장만에 정성을 들였더니 평소처럼 갖추어 졌다. 남편이 예를 다해 절하는 뒷모습에 경건함이 배였다. 봉제사를 효의 제일로 여기는 남편, 그 마땅함을 소리 없이 지켜온 나, 힘이 들긴 했지만 해 놓고 보니 마음은 편하다. 오늘 어머님은 손수 제수를 차리던 자리에서 영정으로 남아 나를 내려다보며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 것일까, 평소의 표정에 잔잔한 미소가 어리는 것 같다.

향을 사르며 생전의 어머님 모습을 더듬는다. 어려운 살림에 4대 봉사 받들며 한평생 조용히 헌신했던 분, 그 큰 마음자리가 그리워 영정을 한없이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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