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재 정 수필가,소이우체국 근무

 
 
농막은 그이가 제일 좋아하는 공간이다. 어느 것 하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어서인지 애착이 많다. 그이가 일하는 시간을 뺀 대부분을 보내는 곳이기도 하다. 아파트가 답답하다며 여름은 여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의 핑계거리로 대놓고 여기서 외박을 한다.

여기에서는 사계를 가까이 느낄 수 있다. 이 곳의 배경이 되어주는 자투리 산이 고스란히 계절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무들이 겨울준비에 들어갔다. 잎을 다 떨군 채 나목으로 서 있다. 이때쯤이면 찾아오던 새들도 발길을 뚝 끊어 고요하기가 절간 같다. 질식할 듯한 고요 때문일까. 나무들도 일제히 묵상에 들어간 듯 보인다. 무소유를 보여주는 모습 같기도 하고 묵언 수행에 들어간 수도승 같기도 하다. 아마도 저 긴 침묵이 끝나면 새들도 찾아오고 봄이 올 것이다.

나무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을 때 다 같은 나무이다. 기계로 잘려지는 순간 운명을 달리한다. 수종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손에 쓰임새가 틀려진다. 장작으로 화형에 처해지기도 하고 수없이 못질을 당하며 집으로 태어나기도 한다.

그이 손에 땔감이 된 고사목은 쓰러질 때 예감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화톳불로 몸을 불사르리라는 것을. 드디어 고사목의 화형식이 시작되었다. 거부의 몸짓인가. 한 생의 애도인가. 연기를 잔뜩 뿜어대어 그이의 눈에서 끝내 눈물을 보고서야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리고는 불꽃을 한껏 피워 올리더니 체념한 듯 불티를 사그라뜨리며 잉걸불이 된다.

이 불은 어린 시절 꺼지는 순간까지 화롯불로 방안의 온기를 주었다. 지금, 나는 온기보다도 된장찌개 끓는 소리와 오빠들과 밥을 비벼먹던 그 맛이 더 그립다. 정작 더 사무치게 그리운 건 화롯불을 두고 둘러앉아 불을 쬐던 오빠들과의 정이다.

그렇게 화롯불에 담긴 그리움을 가슴으로 태우는 동안 잉걸불은 지극히 온순해져 있다. 타닥타닥 경쾌한 소리를 내며 나무의 한 생을 마감하고 있었다. ‘나무야, 마지막 그 순간에 어떻게 노래가 나올 수 있는 거니’ 나는 묻는다.

아마도 땔감으로 정해졌을 때 연기를 낸 것은 잘 타기위한 달굼이었을 것이다. 또한 불꽃을 피워 올림은 몸을 힘껏 태우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비록 화로에 담기지는 못해도 화톳불로라도 온기를 남기고 떠나는 게 타닥타닥 소리를 낼 수 있었던 이유였지 않았을까. 나무의 이 순순한 순응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겨울의 깊은 묵상에서 나온 해탈 같은 것일까.

나는 이십년을 넘게 우체국에서 일을 하고 있다. 이 직업이 운명인 셈이다. 잘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몸짓까지 어눌한 노인들이 많은 시골우체국에서 그 분들과 쉽지 않은 소통을 해야 하는 게 내 업이다. 잘 통하지 않아 갑갑하고 답답할 때가 많아 내가 지치는 날이 늘어나고 있다. 나는 노인들을 울울하다고 제쳐두지 않고 자꾸만 친절을 주리라 다독인다. 칼칼한 젊은이들에 비해 군고구마의 구수함은 있지 않은가.

그이가 넣어둔 고구마가 잘 익었다. 껍질을 벗겨 한입 베어 문다. 달다. 언젠가는 그 분들로 인해 나의 삶에도 입안을 뒤덮는 이런 단맛도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그것이 내가 마지막 길에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유가 될 것이라는 나무의 응답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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