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순 수필가

 
 
아침밥을 짓기 위해 부엌에 들어선 순간 플라스틱 뜯는 소리가 요란하다. 선반까지 오른 것을 보니 들어온 지 오래 된 듯하다. 또 그 녀석이다. 그동안 몰랐다 생각하니 찝찝함을 참을 수가 없다.

결혼했을 당시 우리 집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 안방과 건넛방을 이어주던 마루에 앉아 있으면 참 시원했다. 부엌에는 부뚜막과 아궁이가 있었고 마당에서 물을 받아 살림을 했다. 우리 부부가 가끔 묵었던 건넛방은 쇠죽을 쑤느라 아침저녁으로 불을 때 아랫목은 따뜻했지만 위풍이 많은 옛집이었다. 새댁 시절,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눈물과 콧물을 닦느라 정신없었던 기억이 새롭다.

이제는 20년 전의 집 구조를 잊고 살고 있다. 부엌에 있는 작은 광에는 살림살이가 쌓여 있다. 가끔 우리 집을 찾는 서생원(鼠生員)의 마음에 꼭 드는 곳이기도 하다. 제사를 지내고 봉지에 담아 둔 한과부터 제사에 올리지 않은 잘 마른 북어포까지 충분히 즐길 만하다. 그래서인지 녀석의 출입이 잦아지면서 내 신경은 곤두선다.

환경변화에 적응을 잘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예민하게 움직이는 놈의 존재를 알아채기가 쉽지 않다. 싱크대와 벽의 틈으로 사라지는 녀석을 보는 날이면 온종일 머리끝이 쭈뼛하다. 끈끈이 가장자리를 바짝 잘라 드나드는 곳에 진을 쳐 놓아도 잡히려면 며칠이 걸린다.

자신의 정체를 들킨 쥐보다 더 긴장한 나는 남편을 불러야 했다. 쇠꼬챙이로 잡으려는 남편.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끔찍하여 멀리 서서 잔소리만 쏟아 부었다. 남편은 오후에 다시 잡아보자는 말만 남기고 들로 가버리고 광 앞에 선 나는 마음이 복잡하기만 했다.

살림살이를 하나씩 꺼내 보는 것이 첫 작업이다. 녀석이 튀어 나갈 경우를 대비해 현관문도 열었다. 싱크대와 냉장고 앞은 상을 세워 장벽 치듯 막았다. 광의 살림들을 한 쪽부터 끄집어내며 놈이 가는 방향을 계산했다. 제 집 드나들 듯 해 어이가 없다. 살림살이가 치워진 자리마다 놈의 행적이 대단했다. 지린 냄새와 까만 분비물의 양을 보니 식구를 늘린 것은 아닌지 걱정이었다.

끄트머리 구석으로 몰린 녀석의 몸통은 불청객을 꼭 잡고야 말겠다는 내 마음의 크기와 같았다. 놈은 내 팔뚝 절반 길이의 꼬리를 내게 보였다. 녀석의 몸통만 생각하다가 신경이 꼬리까지 살아 움직이는 모습에 멈칫하며 눈을 꼭 감고 말았다. 결국 긴 꼬리를 바닥에 붙이고 쌓아둔 라면봉지를 넘어 늘 다니던 그 길을 통해 도망쳐버렸다.

어찌하랴. 우리 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 탓이 크다. 약국에서 쌀알로 위장한 약을 샀다. 잘게 썬 사과를 약에 섞어 싱크대 밑에 놓았다. 배고픔에 플라스틱을 뜯던 녀석은 사과냄새를 맡고 몇 차례 들락거리다가 소식이 없다.

사는 동안 불청객이 어디 서생원뿐이겠는가. 작년은 우리들의 마음에 생채기가 컸다. 새해는 살기가 좀 수월하고 편안했으면 좋겠다. 상처받은 이들을 쓰다듬고 위로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래본다.

녀석들의 달리기로 잠이 들지 않아 천장만 바라보던 옛집이 그리운 것도 나이 한 살을 더 먹어서 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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