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영 섭 칼럼리스트

 

 
 

시골 고향에 구순이 되신 노모님이 동생과 살고 계신다. 늘 시골집에 가면 제일 먼저 집안 구석구석을 한 바퀴 돌아본다. 안채 뒤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나를 그 자리에 얼어붙게 하는 것이 있었다. 은빛 찬란한 스테인레스사발에 표면만 살얼음 된 정화수였다. 어린 시절 팔남매의 숨바꼭질 장소로도 쓰였던 장독대이다.

집에 들를 때마다 보곤 하는 정화수였다. 오늘 같은 엄동설한에 살얼음이 살짝 얼어 있음은 물을 갈아 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증거인 것이다. 오늘 새벽에도 구순이 되신 어머님께서는 어김없이 치성을 들이 신 것이다.

봄, 여름, 가을에는 하이얀 사발을 사용하는데 겨울인지라 얼어 깨지기 때문에 스테인레스 사발로 바꾼 것이었다. 팔남매를 위해 빌고 또 비신 것이다. 이른 새벽 살을 에는 추위에도 새로 물을 갈아 놓으시는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늘 그 자리에 놓여있던 하얀 사발이다. 어머님은 팔남매를 기르시며 온갖 어려운 일들을 무수히 겪어내셔야 했다. 정화수는 샛별과 달빛을 먹은, 해뜨기 전의 최초의 순수한 물을 의미한다고 한다. 엄동설한 추위 속에서도 이른 새벽 우물가에서 정화수를 길어 올리시던 그 정성으로 우리 팔남매를 길러내신 것이다.

우리나라 부모들은 무조건적인 자식사랑으로 평생을 희생하셨다. 자녀의 학업, 취직, 결혼, 심지어는 취직까지 무리를 해서라도 당신들의 노후는 생각지도 않고 최선을 다해 전념한다. 필자도 부모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부모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따라가기란 불가능하다고 느낀다.

요즈음 명절 때 고향에 가보면 쓸쓸하기 그지없다. 시골에는 노인분들만이 굽어진 허리에 무거운 삶의 무게를 지시고 고향을 지키신다. 모두 우리의 어버이들이시다. 명절연휴 만 되면 많은 사람들이 국내 관광지로, 해외로 황금 같은 기회라며 여행을 떠난다. 또 요즈음 애완동물에게 얼마나 정을 쏟고 공을 들이는지 모른다. 노부모님들께도 그렇게 하는지 의문이 간다.

연로하신 할아버지, 할머니 손발한번 씻겨드리지 않는 사람들이 애완동물은 하루가 멀다 하고 목욕시켜 꾸며 주는 것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비록 떨어져 부모님을 모시지 못하여도 출필고반필면(出必告反必面)으로라도 효를 행합시다. 여행을 가든지 가족외식을 가든지 현장에서, 집에서 자주 전화로 안부를 묻고 어디를 다녀왔습니다. 무엇을 보았습니다. 무엇을 먹어 보았습니다. 참으로 살기 좋은 세상입니다. 일상의 평범함을 밝은 목소리로 전해드립시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어려운 일이 아니니 행하여 봅시다. 그리고 자식들에게도 권하여 버릇을 들입시다. 우리도 머지않아 곧 노부모가 된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맙시다. 석가의 말씀에 자식의 얼굴이 즐거우면 어버이도 기뻐하고, 자식이 혹시 근심에 싸이면 어버이의 마음도 애가 탄다고 했다. 구순이 되신 어머님께서는 늘 귀가 할 때마다 90도로 꺾인 허리에 지팡이를 짚으시고 운전조심하여 가라고 신신 당부를 하신다. 60대후반인 자식도 어머님에게는 걱정이신가 보다.

승용차 후방카메라에 비친 어머님은 내 차가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미동도 않고 서 계신다. 효도가 별건가. 이제는 얼마나 사실지 모르니 자주 찾아뵙고 매일 전화로 안부를 여쭙는 길 뿐이다. 송강 정철의 시조가 가슴속에 전율로 흐른다. ‘어버이 살아 실 제 섬기길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리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 이 뿐인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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