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숙자 수필가

 

 
 

단풍 따라 길을 나섰다. 뉴스에서는 지금 설악산 단풍이 절정이라 하는데 중부 내륙 여기도 단풍철 초반을 넘어가는 중이다. 오늘 우리는 문우들과 함께 보은에서 열리는 충북문학인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시간을 내었다. 문학이라는 것이 사는 일과는 무관하여 무슨 세미나니 대회니 하는 모임에 불참한 지 오래되었다. 그런데도 길을 나선 것은 순전히 단풍 때문이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가을을 만끽하러 여행길에 오르고, 산행에 나서고, 어떤 이들은 야간 산행도 서슴지 않는다. 그 용기가 부럽지만, 내가 고작 집을 나서는 것은 농막에 드나드는 것뿐이다. 이런 형편을 아는 후배들이 바람도 쐴 겸 보은에 다녀오자고 유혹했고, 나는 그 유혹에 넘어가고 만 것이다.

차는 괴산을 거쳐 미원, 청천으로 향한다. 단풍은 나무에만 드는 게 아니다. 콩잎도 노랗게 물들고 볏잎도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그런데 고목이 된 내 가슴은 단풍은커녕 찬바람만 분다. 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열 살, 스무 살 어린 후배들과 어울릴 때도 제일 빨리 정서의 술기운이 돌았고 익살 또한 둘째가라면 서운할 만치 종횡무진으로 튀었다.

내 기분을 헤아렸는지 운전대를 잡은 후배가 이때다 싶게 유머의 장을 펼쳤다. 차 안은 금방 불쏘시개에 닿은 불꽃처럼 웃음이 피어올랐다. 예의상 잠깐 헛웃음을 보인 나는 이내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디쯤인가 은행나무 작은 숲이 보였다. 은행나무 숲도 노랗게 타오르고 있다. 숲 주변에 “은행나무 축제”라는 현수막을 걸어놓고 사람들이 천막 안에서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일 년 농사 대풍을 자축하느라 얼굴이 불그스레하다. 우리나라 시골마을도 이즈음 축제가 많이 열리고 있다. 사람을 모으고 공연하고 농산물을 파는 축제가 대부분인데 이 마을 은행나무 축제는 마을 사람들끼리만 모인 소박하고 정겨운 마을잔치 같다.

네 사람이 타고 가는 차 안에는 심심찮게 핸드폰 벨이 울린다. 까톡! 카똑! 이놈의 벨이 울리면 차안은 바로 조용해진다. 서로 말없이 자기 폰에 눈을 박고 킬킬거리고 답장 쓰고, 우리는 금세 완전 타인처럼 덤덤해진다. 이것이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폰 문화다. 같이 있되 제가끔 세계에서 노니는 이상한 문화. 대화를 차단시키는 요상한 기계는 문명의 이기일까, 장애물일까.

카톡이 잠잠해지니 밖에 먼 산의 단풍빛이 들어오고 바람결에 지는 잎들이 차창에 부딪치는 장면도 가을정취다. 하루에도 사계가 있다더니 지금 오후 2시는 여름일까, 가을일까.

바로 그때 여태 잠잠하던 내 폰이 부르르 떨었다. 전화는 불가하고 문자만 가능하니 누가 안부문자를 보낸 모양이다. 나는 천천히 폰을 꺼내 문자를 읽었다.

“게으름 피다 오늘 안과에 가는 전철 안에서 ‘눈물로 씨 뿌리던 졸업식’을 읽고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차가워지는 날씨 감기 조심하시고 일간 한번 저녁식사 모시겠습니다. 음성부군수 ”

이상한 일이다. 간단한 문자 한통에 고목 같던 가슴이 환해지는 거다. 스멀스멀 무언가 일어나는 것 같고 세상이 온통 내 것인 양 뿌듯해지는 순간 내 눈도 울컥 젖어오는 것 같다. 이런 감정을 감성의 오르가슴이라 하는지 모르겠다.

 

작가가 글을 써서 책을 내면 그 글은 이미 내 것이 아니라 독자의 것이 된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글을 읽고 느끼는 감정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오늘 내게 문자를 보낸 분은 지난번에 증정한 선집《이쁘지도 않은 것이》를 다 읽었다는 소식을 후배를 통해 전했다. 그분은 시간을 내어 누구의 수필도 읽어보지 않았다 했다. 이유는 군 행정업무만 해도 산적한 현안들로 책을 읽을 만한 정서의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라 했다. 그런 분이 시골 할머니의 글을 꼼꼼하게 읽고 문자까지 보낸 것은 의외의 일이다.

문득 어떤 정신과 전문의가 쓴 글이 생각난다. 조용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물결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기 듯이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나의 파동이 동심원을 그리며 번져나가 상대에 닿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글을 읽은 한 독자의 파동이 내게로 물결쳐와 지금 그분과 나의 감성의 물결은 주파수가 같아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동안 책을 여러 권 냈다. 지금쯤 그 책들은 어느 서가에서 귀한 대접을 받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들도 있겠지만, 뉘 집 장롱 받침으로 용을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작가들은 글을 쓰고 새끼 분만하듯 책을 출간한다. 생리적인 어떤 채움 같은 것일지도 모르나 나에게는 벗음과 같은 것이다. 지금껏 지녀온 것들이 자체무게만으로도 나를 편하게 하지 않는다. 기억을 지우고 추억까지 지울 순 없으나 오랜 세월 혈관의 피딱지처럼 붙어있는 녹슨 관념들은 과감하게 버려야 새 피가 고이지 않을까 싶어서다.

이번에 낸 책에는 60편의 삶의 조각들이 담겼다. 그 60개의 화살 중 몇 개가 누구의 가슴을 명중할지 나는 모른다. 다만 쏘지 않으면 그 화살에 내가 맞아 죽을 것 같아 쏠 뿐인 것이다. 같은 작품을 읽더라도 읽는 사람의 취향과 시대성과 삶의 방식이 맞아떨어질 때 더욱 공감하는 것 같다. 더 나아가서는 공명에 이른다면 작가로서는 그보다 더한 행복이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충만감을 그 어떤 희열보다 우선순위에 둔다. 비록 내 글에 절망하는 순간이 수도 없이 닥칠지라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또 글을 쓸 것이다. 감성의 물결이 하나의 파동이 될 때 작가들은 고독한 작업에 목숨을 걸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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