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숙자 수필가

무심코 지나치던 벚나무에서 올록볼록한 새싹의 움이 보인다. 추운 겨울을 이겨 낸 나무가 꽃 피울 준비를 하는 것이다. 여름부터 다음 해의 봄을 준비하는 나무의 치밀한 계획이 부러운 것은 요즘 내 마음에 부는 바람 때문이다.

며칠 전,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사위와 뜻이 맞지 않아 티격태격 했다며 우울한 말투였다. 누구도 평생 동안 즐겁고 행복하게만 살 수 없을 것이다. 다투기도 하고 미워하면서도 서로 의지해 시간의 레일을 달리지 않는가. 이해하고 참으라는 말을 했지만 그 말이 위로가 되지는 않았을 것 같다. 통화는 그것으로 끝났지만 내 가슴에 매달리는 걱정은 더해간다.

도시에서의 삶을 접고 시골로 와서 살기 시작할 때이다. 남편과 말다툼을 하고 집을 나왔다. 낯선 곳이라 아는 사람이 없어 놀이터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막상 집을 나왔지만 갈 곳도 없었다. 속내를 털어놓을 친구라도 있으면 영화를 보러 가든지 차나 한 잔하면서 수다라도 떨고 싶었다. 그러나 이곳으로 온지 얼마 되지 않으니 친분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동네 빵집에 들어가 팥빙수 한 그릇을 먹으며 마음을 달랬다.

지금 생각해 보니 왜 다투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에 없는 것을 보면 그리 중요한 일로 다툰 것은 아닌 것 같다. 살면서 정말 하찮은 일로 수없이 다투고 속 끓이며 사는 것이 부부관계가 아닐까 싶다. 그래도 자식이라는 끈으로 아니면 연민이라는 감정으로 곡예를 하듯이 난관을 넘어간다.

딸은 지금 자신이 심각한 어려움에 처해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아주 사소한 일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저도 엄마이기에 꿋꿋하게 지금의 아픔을 이겨낼 거라 여긴다. 나무는 폭풍에 가지가 부러져도 아픔을 삭이고 버젓이 살아 새로운 잎을 피우는 것처럼 시간이 흐르면 다시 정겹고 현명한 아내로, 자상하고 지혜로운 엄마로 살아 갈 것이다.

딸이 어렸을 때다. 피아노 학원에 다니는데 다른 아이들보다 월등히 앞선다고 선생님께서 전공을 시키면 어떻겠냐고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발표회 때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암보로 연주하여 재원 소리를 들었다. 나는 피아노는 바이올린을 배우기 위한 기초 공부라고 생각했다. 바이올린으로 악기를 바꾸자고 권했지만 본인은 피아노를 하겠다고 굳이 고집을 부렸다. 모녀간의 갈등은 어미가 포기함으로써 끝을 냈다.

그때의 아쉬움이 남았는지, 아니면 자기가 못한 것을 가르쳐 대리만족이라도 하려는지, 아직 네 살도 안 된 손녀딸을 조기교육 시킨다고 바이올린 학원을 열심히 데리고 다닌다. 부모라고 자식을 맘대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직은 어리기에 본인의 의사를 알 수 없지만 아이의 뜻도 헤아려 서로의 바람대로 잘 해결해 나갔으면 좋겠다.

혹시라도 제 딸에게 집착해서 사위를 외롭게 하지는 않았는지, 아니면 너무 바쁘게 살아서 내외간에 대화가 끊어졌는지 멀리서 애타는 에미 마음을 아는지. 출가외인이라고 했지만 딸을 가진 부모는 결혼을 시키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둘이 마음 맞춰 잘 살아주는 것이 최고의 효도라고 늘 말해왔다.

나는 오케스트라 연주를 보고 듣기를 즐긴다. 요즘은 공연장에 직접 가기는 어려워 인터넷에서 보기 시작했다. 시골에 살면서 문화생활 누리기가 어렵지만 인터넷의 발달로 아쉬움을 대신할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나이 들어서는 몸체 생김이나 음색이 사람과 흡사한 첼로 연주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도 제일 선호하는 악기는 바이올린이다. 내 손녀가 십 이삼년 후에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장영주 못지않게 연주하게 되기를 희망해 본다.

많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악보를 보고 규칙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연주를 하면서 나오는 화음의 오묘함이 나를 사로잡는다. 각기 다른 악기를 다루면서 어울림으로 승화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인데 신기하게도 지휘봉 끝의 움직임 하나로 모든 음률이 절정을 이룬다.

협주곡, 콘체르토는 대립이나 대결이란 뜻과 함께 화합과 조화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악기들 끼리 각기 따로 연주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사이좋게 서로 이끌어 간다. 섬세하고 고운 음을 내는 현악기도 조율 전에는 어느 소리와도 어울리지 않은 굵고 거친 소리를 낸다. 갈등과 화해가 한 자리에 퍼지르다가 자연스러운 해결의 끝을 맺는다.

어쩌면 가정이라는 사랑협주곡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도 저마다 자기 고유의 음을 최선을 다해 내며 양보하고 어울리고 또 참아갈 때 전체의 하모니가 이뤄지는 것이 아닐까. 나무가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야만 화려한 사월의 꽃을 피울 수 있듯이 지금은 잠시 음 이탈로 화음이 맞지 않지만 꽃샘추위쯤은 잘 이겨내고 벚꽃만큼이나 아름다운 모습의 가정을 꾸려가기를 염원한다.

나는 지금 간절한 마음으로 전화 한통을 기다리고 있다. “ 엄마, 우리 화해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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