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만세시위’ 창의적.지속적 계승 노력 절실

 

소이면 한내장터 독립만세 기념공원.
소이면 한내장터 독립만세 기념공원.

 

 

▲대소면사무소 광장에 조성된 3.1독립만세 기념공원 모습.
▲대소면사무소 광장에 조성된 3.1독립만세 기념공원 모습.

 

3월엔 태극기가 펄럭여야 한다 / 3월엔 만세소리 메아리쳐야 한다 / 장날이면 밤낮으로, 서당과 골목에서, 장거리와 뒷동산마다 / 일제로부터 독립을 외치던 피빛 절규 / 총칼에도 꺾일 줄 모르던 의연한 눈빛 / 짓밟히고 깔아뭉개도 꿋꿋하게 피어나는 싱그런 몸짓 / 뿌우연 3월 하늘에 선명하게 적어야 한다 / 메마른 3월 대지는 또렷하게 기억해야 한다 /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를.... --기자의 졸시, ‘3월 하늘과 대지에서’ 중에서--

98년 전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되어 한반도 방방곡곡으로 들불처럼 번졌던 항거가 있었다. 일제에 유린당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평화적 만세시위. 세계사에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평화적 독립운동으로 평가받는 3.1만세시위. 3.1정신은 대한민국 헌법에도 명시된 건국이념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 음성군 지역에서 전개됐던 3.1만세시위는 충북도에서도 가장 격렬하게 펼쳐졌다.

본보는 숭고한 3.1정신을 창조적이고 지속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키려는 목적으로 음성군에서 펼쳐졌던 3.1만세시위 상황과 현재 3.1절과 관련된 현황을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소이 한내장터 독립만세 기념공원 내 한내3.1만세사적비 모습.
▲소이 한내장터 독립만세 기념공원 내 한내3.1만세사적비 모습.

 

◈ 3.1 독립만세시위

구한말 외세의 침략에 시달리던 우리 민족은 1910년 일본에게 완전히 국권을 잃고 본격적으로 일본제국주의의 통치 아래 들어갔다. 이후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해오던 민족지도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 종결(1918년 11월)로 개최된 파리강화회의(1919년 1월)에서 천명한 ‘민족자결원칙’과 1919년 2월 8일, 일본 동경에서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 소속 유학생 400여 명이 발표한 독립선언서에 자극을 받았다. 이에 민족대표 33인은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납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 만세시위는 같은 날 평양 등 여러 곳에서 거의 동시에 일어났으며, 이후 5월 말까지 전국 방방곡곡은 물론, 해외까지 확산돼 한국인이 사는 곳은 어디서나 크고 작은 규모로 모여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3·1만세시위는 비폭력.평화적 항거로 전개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일제는 헌병과 경찰, 정규군까지 동원해 시위 군중을 살육하고, 민가·교회·학교 등 공공시설에 불을 지르고 강제로 패쇄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3·1만세시위 때 일제에게 학살된 한국인은 7,509명, 부상자 1만5,961명, 체포자수가 4만6,948 명에 이르고, 민가 715개, 교회당 47개, 학교 2개소가 불타버렸다.

 

▲음성군청에서 개최된 독립운동 기념사진전 모습.
▲음성군청에서 개최된 독립운동 기념사진전 모습.

 

◈ 음성군의 3.1만세시위

음성군의 독립만세시위는 충북도에서 가장 격렬하게 진행돼 많은 희생자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음성군 만세시위는 특히 소이면과 대소면에서 크게 일어났다. 음성군 만세시위는 서울에서 3월 1일 최초 의거 이후, 18일이 지난 후에야 불붙었다. 3월 18일 음성읍에서 첫 만세시위 이후, 4월 1일부터 6일까지 음성군 각 읍.면에서는 한 차례 이상 씩 시위가 일어났다.

 ◯ 음성읍

음성읍에서는 3월 18일 장날에 만세시위가 발생했다. 이날 만세시위는 천도교인 양준성, 김용진, 신광노, 김두환 등이 주도했다. 이어 3월 28일 오후엔 초전리 서당에 다니던 김영익·정민영·최만득·정대영 등이 주도해 만세시위가 다시 일어났다. 이날 시위 결과 서당 학생 3명과 일반인 1명이 왜경에 체포되었다. 또한 4월 6일 밤 9시 경에도 약 500여 군중이 횃불 만세시위를 했다.

 ◯ 소이면

소이면 한내[漢川] 장터에서는 4월 1일 김을경·이중곤·권재학 등의 주도로 수많은 군중이 장터에 모여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후 시위군중은 면사무소로 몰려가 면장 민병식을 끌어내 함께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일본경찰이 출동해 주모자를 연행했는데, 이에 분노한 시위군중들이 동지의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히 항쟁하였다. 그러나 충주에서 출동한 일본수비대가 무차별 발포로 십여 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소이면 만세시위를 주도한 6명(김을경, 이중곤, 권재학(재신), 추성열, 이교필, 이용호)은 체포돼, 일본경찰에 피검돼 청주지청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이용호가 태90대를 맞는 고문으로 순국하고, 김을경(1년6개월), 이중곤(1년), 권재학(1년), 추성열(6개월), 이교필(6개월) 등은 옥살이를 살았다.

◯ 대소면

대소면에서는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했던 박병철·민병철·박영록·박제성 등이 주도하여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4월 2일 밤, 대소면 오산리 대소면사무소에는 사전 약속에 따라 군중 1천여 명 군중이 모였다. 이들은 군중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부하고, 군중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때 면장과 면 직원들이 나타나 시위 중단과 해산을 종용했다. 이에 격분한 시위 군중들은대소면사무소 유리창과 기물, 그리고 장부를 파손하는가 하면, 임경순 등은 면사무소에 불을 질렀으며, 이성교는 일본경찰 河野의 어깨를 쇠스랑으로 내리쳐 중상을 입히기도 했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일경 진천 수비대가 출동해 무력으로 시위군중을 해산시켰다. 또한 같은 날 밤 오류리 뒷산에서 송인식, 임병철, 박제성 등 수십 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 결과 이성교, 임백규 등 2명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았고, 특히 이성교는 출옥 후, 목을 매 자살했다.

◯기타 지역에서의 만세시위

이 밖에도 금왕읍과 원남.삼성.감곡.맹동면 등 각 지역에서도 산발적으로 만세시위가 전개됐다.

금왕읍 내송리에서는 4월 2일, 지우인 안후선의 영향을 받은 구광서 등이 앞장서서 1천여 명의 주민들이 참가해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무극장터로 가는 중에 숫돌고개에 일경들이 배치해 기다린다는 정모 씨의 제보를 받고, 인명피해를 우려해 비선거리에서 만세를 부른 후 해산했다.

원남면에서는 4월 5일, 보천시장에서 시위군중들이 만세시위를 벌였고, 11일에는 주봉리에서 80여 명의 주민들이 만세를 외쳤다. 이로 인해 이교설, 장일귀, 서정오 등이 태90도 처분을 받았다.

삼성면에서는 이성용의 주도로 4월 2일 삼성면 선정리와 삼성면 천평리 일대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이성용은 이날 밤 수십여 명의 주민들과 선정리 뒷산에서 독립만세를 외친 다음, 군중을 이끌고 주재소가 있는 천평리로 이동하여 격렬한 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 결과적으로 이성용은 체포돼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였으나 일제로부터 극심한 감시와 탄압을 받다가 결국 자결하고 말았다.

감곡면에서는 1919년 4월 1일에 만세시위가 전개되었고, 이튿날인 4월 2일에는 주천리에서, 그 다음날 4월 3일 밤에는 문촌리에서 수십 명 주민들이 송석봉의 주도로 응봉산에 올라 횃불을 올리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맹동면에서는 3월 20일, 주민 수백여 명이 횃불을 올리며 만세시위를 벌였고, 4월 2일에는 맹동면 소재지인 쌍정리 뒷산에서 김화서·김해룡·백순규 등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대소 오류공원에 설립된 기미독립만세기념비 모습.
▲대소 오류공원에 설립된 기미독립만세기념비 모습.

 

◈3.1정신을 창조적으로 계승.발전하는 음성군을 꿈꾸며

98년 전 음성군에서 펼쳐졌던 독립만세시위는 다른 곳 못지않게 치열했다.

이에 음성군은 소이면 중동리 한내장터와 대소면사무소 광장에 기념공원을 각각 조성했다. 또한 대소면 오류공원과 음성읍 초천1리 뱅거리 마을에도 3.1만세 기념비가 세워져 있기도 하다. 또한 음성군은 해마다 3월 1일이면 소이면과 대소면에서 그날의 감동과 의미를 재현하는 행사를 개최하며, 선조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그리고 3.1정신을 가르치고 전수해야할 일선 교육계에서는 3.1절 기념 단축마라톤에 소수 인원이 참석하는 게 전부다. 그런데 올해는 이마저도 AI사태로 인해 분향소만 운영하는 것으로 축소됐고, 단축마라톤은 취소됐다.

현재 3.1절과 관계된 행사나 교육은 단지 이뿐. 이외 3.1절에 대한 행사나 교육은 전무하다. 우리나라 건국이념이며, 충북에서도 가장 격렬하게 전개됐던 음성군 3.1만세시위가 오늘날엔 단지 1회성 단발 행사로 그친다는 말이다. 10만 인구를 넘어 음성시 건설을 목표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음성군은 지역주민의 자긍심을 높이는 방편으로 3.1정신을 적극 계승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정책 계발과 전승에 대한 의지가 절실하다. 3.1만세시위 역사관을 건립하고 상설.운영하는 것을 비롯해, 체험프로그램 등 다양한 사업을 발굴해 진행해야 한다.

내후년이면 3.1만세시위도 100주년을 맞는다. 음성군에서 펼쳐졌던 3.1만세시위 역사 복원을 비롯해, 애향심과 건전한 군민정신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노력이 요구되는 때다.

사실 3.1절은 2월 하순부터 시작된 봄방학이 3월 2일 이후 입학과 개학으로 시작되는 국내교육 체계로 인해 대부분 그 중요성을 망각하곤 한다. 학교와 교육인들이 3.1정신에 대해 소홀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그러나 앞서 소개한 것처럼 3.1만세시위는 단순히 3월 1일에만 일어난 게 아니다. 3월 1일을 시작으로 무려 3개월 동안 전국 곳곳과 심지어 해외에서까지 펼쳐진 자랑스럽고 거국.거족적인 독립항쟁이다. 이 점을 잊지 않고 학교와 지역사회에서도 3.1절과 관계된 교육과 사업, 프로그램을 적극 계발해야 한다. 학교장이나 교원들 인사.이동이 있을 때, 지역사회에 조성된 3.1절 기념비를 참배하는 전통. 개학.입학과 함께 시작되는 교육의 첫발걸음을 3.1절 교육과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3.1정신을 계승하는 어린이들과 청소년들 모습. 각 읍면 기관단체장과 주민들이 지역행사와 함께 자주 3.1절 기념공원을 찾는 모습을 꿈꾸는 것은 단지 기자만의 일장춘몽에 불과할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는데....

 

▲음성읍 초천1리 뱅거리마을 3.1독립만세유적비.
▲음성읍 초천1리 뱅거리마을 3.1독립만세유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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