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숙자 수필가

 
 

언제부터인가 말 한 필을 기르고 있다. 성질이 급하고 외골수인 야생마를 길들이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나를 버텨주는 지렛대도 되어주니 불평할 처지는 아니다. 실은 반생을 순한 말과 동거를 했다. 주인의 말이라면 불평 없이 순종하는 그 말은 싫증이 났다. 야생마야말로 당기고 밀치는 삶의 보륨이 있어 죽이 맞았다.

이 말은 호기심이 많아서 제자리에 멈춰있는 것을 질색한다. 가보지 않은 곳, 해 보지 못한 일에 대해 남다른 관심이 많아서 늘 깨어 있다. 정주는 금물이다. 저 혼자 오랜 시간 방치하면 제 집을 머리로 들이받아 망가트리거나 우리를 넘어 탈출을 시도하여 길들이는 일이 요원하다. 이 말이 충동을 해서 요령 없는 마주가 죽을 뻔한 일이 있다.

몇 년 전 태국에 갔을 때다. 젊은 사람들이 파타야 앞바다에서 패러 세일링을 즐기는 것을 뒷짐 지고 보고 있었다. 후배들이 하나, 둘 나서며 표를 끊자 잠자코 있던 말이 속에서 요동을 치는 거였다. 타자고, 이번에 안타면 더 늙어서는 어림없다고, 혹여 공중을 날다가 숨이 멈춰버린들 무슨 대수냐고. 마주는 이 꼬임에 넘어가서 앞으로 나섰다.

유혹은 공포와 은밀한 쾌감을 동시에 준다. 구명조끼를 입고 출발선에 섰을 때 가슴이 벌렁거리고 손에 생 땀이 났다. 선참자의 비행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 하늘을 올려다보다 검푸른 바다를 보고는 어금니를 물었다. 갑자기 누가 등을 밀자 붕하고 공중부양을 했다. 그 순간 몸은 새의 깃털처럼 가벼워지며 전신을 파고드는 홀가분한 기분은 지상에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밀도 있는 쾌감이었다. 아득한 하늘 속으로 사라져버려도 좋겠다는...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하늘 속이 궁금한 거였다. 고도를 높일수록 개체는 없어지는 듯한 느낌, 순간 몸이 바다로 급속 낙하하면서 물에 첨벙 빠졌다가는 다시 붕 떴다. 엔딩자막이 스쳤다. 내 안의 말도 조금은 놀란 듯싶었다. 그러나 이내 평정을 되찾고 의기양양해졌다. 모든 것은 모험심이 있어야 새 세상을 만날 수 있다고 정체는 죽음과도 같다고 괴변을 늘어놓았다.

그 후, 한동안 잠잠했다. 그가 잠잠하면 평화가 찾아온다. 평화란 나태의 또 다른 얼굴인 줄 모르고 타성의 일상을 누린다. 내 안의 말은 이런 시간을 제일 못 견뎌 한다. 숨만 쉰다고 산 것이 아니라고 틈만 나면 세뇌를 시킨다.

떠나야 한다. 등에 배낭하나 달랑 메고 표를 끊어서 기차를 탄다. 목적지가 없다. 어떤 겨울에는 매력 넘치는 그리스인 죠르바를 따라 주야장천 헤매고 그 바닷가에서 죽도록 춤을 췄다. 멋진 자유인 그의 철거덕거리는 장화소리도 좋고 수염도 좋고 분망도 좋다. 그가 치는 산투르 소리는 상상만으로 황홀했다.

내 안의 말도 죠르바를 닮아간다. 한번은 이놈의 충동으로 개헤엄도 못 치는 사람이 바다로 들어갔다. 그는 충동이라는 호기심을 미끼로 쓴다. 하늘도 올라가 봤고 땅 위는 수십 년 간 탐험해 봤으니 이제는 물속 나라가 궁금하지 않냐고. 여의도 63빌딩 아쿠리움을 보았고 해양 아쿠리움도 텔레비젼 화면에서 가끔 보았지만 현장에서 육안으로 본 것만 당하랴. 말은 나를 꾀었다.

 

필리핀 따가이따이 여행 때다. 화산재를 밟으며 늙은 말에 올라 화산분지를 오른 탓인지 말은 의기충천하여 물속으로 들어가자고 생떼를 썼다. 얼굴에 물안경을 쓰고 잠수를 하는 후배들이 한 마리 인어가 되어 유유히 노니는 광경이 인상적이었다. 나이를 생각했다. 내일 모레면 팔십 고개로 오르는 노구에 욕망은 사치라고 나를 주저앉히느라 안간힘을 썼다. 바로 그때다.

내 안의 말이 나이타령 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고 닦달했다. 푸른 바다 속이 어떤 색깔을 품고 있으며 어떤 생물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냐고 그건 맞는 말이다. 한 때는 바닷가에 태어나서 숨비 소리 내며 바다를 주름잡는 해녀가 되었으면 했다. 그 이유는 보는 것 말고도 식욕을 자극하는 갖가지 해물들이 유혹해서다. 심층에 내려가서 지느러미 하장 대며 바다의 속살을 느끼고 싶었다.

나는 뛰어들었다. 신비였다. 물안경 밖으로 펼쳐지는 바다 속엔 또 하나의 세상이 있었다. 바위에 붙어있는 산호나 조가비나 말미잘이나 어느 것 한 가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초록빛 춤을 추고 있었다. 움직인다는 것은 바로 살아있는 것, 이들은 모두 바다라는 목초지에서 생동하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숨이 막혔다. 질식 직전 나는 죽기 전에 물고기가 요동을 치듯이 그런 몸짓으로 빠르게 솟아올랐다. 그 시간이 한 십 분쯤 되는 줄 알았는데 고작 3분이었다고. 그러나 3분의 마력은 지금도 나를 꿈꾸게 한다.

말이 안내하는 곳은 언제나 새롭다. 신천지는 아니라도 내 감각이 새롭게 느끼는 세계, 꿈 꿀 수 없는 사랑을 꿈꾸게 하고 음치인 줄도 모르고 노래하게 한다. 생이 끝나는 날, 내가 길들인 이 말을 타고 또 다른 별로 떠날 것이다. 자유를 찾아 떠날 것이다. 카잔차키스 조르바 래도 좋고 돈키호테도 좋다. 아니 우리 곁에 다녀간 방랑시인 김삿갓도 좋다. 또 다른 목초지를 향해 미지의 자유를 향해 유랑을 떠날 것이다. 나는 노마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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