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진 수필가

이른 아침 황당하게도 카카오 톡으로 3단 근조를 받았다. 선명하게‘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조화화환을 받고 보니 아연한 기분이었다. 상대방은 옆의 장미꽃 대신 3단 조화를 터치했다며 구구절절 해명을 했다.

우선 나도 실수를 할 수 있으니 기분을 돌리자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는 오늘의 나는 죽고 내일부터는 새롭게 시작하라는 징조로 풀어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너무 현상에 기대서 해석하는 버릇을 좀 고쳐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저런 생각으로 마음을 달랬지만 너무 골똘했는지 오후가 되면서 머리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어쩐지 나쁜 일이 생길 것 같은 마음에 불안하기도 했다.

그런데 얼마 후 큰아이가 면접을 잘 봤다는 전화를 했다. 지금까지 아프던 게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게다가 저녁에는 작은아이가, 꼭 일 하고 싶었던 문화사업단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는 문자를 받았다. 괜한 걱정에 시달린 것 같다고 청소를 시작하는데 나는 강의 계획서를 보내보라는 연락이 왔다.

뜻밖이다. 예로부터 상여를 보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아침에 조화를 받아서인가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해석하려고 노력했기에 좋은 일이 생겼는지 모를 일이다. 물론 조화를 받지 않았어도 그리 일은 진행되었을 것이지만 무엇이든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한 셈이다.

사람이 죽는 일을 유쾌한 일이 아니니 회피할 수도 있다. 그러기에 상여를 보면 나쁜 액은 망자가 다 거두어 간다고 최면을 거는 지혜가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였을까 장례식 전 날 가짜 상여를 내보내면서 닭죽을 먹었던 어릴 적 기억이 잡힐 듯 선하다. 장례 전날 밤에 가짜 상여가 나갔다. 아마도 그것은 망자에게 이제 내일이면 정든 집을 떠난다는 알림이었고 상주들에게는 내일이면 이별을 하니 미리 준비하라는 신호였을 거라 생각한다. 가난하던 시절이라 집에서 키우던 닭을 잡아 대접을 했을 것이고 고기의 양과 쌀이 많지 않으니 죽을 끓이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함께 지냈던 누군가 세상을 떠난 경황 중에 무에 맛이 있으랴만 함께 챙겨 먹으면서 정작 내일이면 영원히 헤어지게 될 슬픔을 잊었을 것이다. 게다가 앞으로 살면서 계속 누군가의 죽음을 지켜볼 테고 더욱 자기도 언젠가는 죽어야 되는 절박한 상황을 잊기 위해서라도 상여와 재수 운운하면서 함께 슬픔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지 않았을까 싶다.

 아프리카 가나에서는 장례식에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망자와 인사를 시키기도 하고 다양한 모양의 화려한 관을 사용하기도 한다. 망자가 더 좋은 곳으로 가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의 장례식은 엄숙하지만 재수가 좋다는 말을 운운한다. 그로써 장례식의 우울한 분위기를 바꿔 보려는 의도였을 것 같다. 문화의 차이가 있을 뿐 동서양 모두 죽은 자에 대한 슬픔을 승화 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꽃, 그중에 조화라 이름 지어진 화환하나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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