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자 수필가

 

 
 

 정월 된장을 담기로 마음먹고 메주콩 서너 말을 준비했다. 여러 차례 콩을 삶아 메주를 띄웠고 청국장도 띄워 건조시켜 가루를 만들어 놓았다. 된장 거를 때 쓰려고 지난 가을 김장거리를 준비 할 때 고추씨를 분리해 곱게 빻아 두기도 했다.

장 담그기 전날 염도계가 없어 달걀을 띄워 소금 양을 대신했다. 하루 전에 소금물을 준비하는 것은 이물질을 가라앉히기 위함이다. 엎어놓은 항아리 안에 물기가 마르기를 기다려 볏짚을 태워 소독을 했다. 그리고 깨끗이 씻어 볕에 말려둔 메주를 넉넉한 품을 가진 항아리 속에 차곡차곡 채웠다. 엄나무 가지를 가로질러 메주를 눌렀다. 소금물을 부었을 때 떠오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풀어놓은 소금물을 바가지로 조심스럽게 떠 붓고 대추, 고추, 참숯을 마지막에 띄웠다. 잘 익을 된장을 꿈꾸며 항아리 뚜껑을 덮었다. 깨끗한 행주로 장항아리 둘레를 닦으며 내 삶에도 이런 숙성시간이 필요함을 느낀다.

된장의 재료인 콩은 부모님을 닮은 것 같다. 몸을 다져 간장과 된장이 되어 주고도 더 못주어 아쉬워하는 그분들의 사랑이 느껴진다. 기억 속 할머니는 긴 광목 앞치마에 머릿수건을 두르고 종일 우물물을 길러 장 담그기를 하셨다. 장 담그기가 마무리 되면 소죽 끓이는 아궁이에서 벌겋게 타고 있는 참숯을 가져다 넣고 홍고추를 띄웠다. 그리고는 항아리 둘레에 솔가지와 붉은 고추를 역어 금줄을 쳤다. 부정 타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 하셨다.

십여 년 전 어머님이 다시는 뵐 수 없는 먼 곳으로 우리 곁을 떠나셨다. 하지만 장독대에는 해마다 담그신 된장과 간장이 넉넉했다. 어머님의 정성과 사랑으로 담백하고 맛깔스러운 식탁을 준비할 수 있었다. 된장 맛 또한 최고였고. 친인척들에게 인심도 후하게 썼다. 몇 년 후 된장은 동이 났고, 이제는 된장을 직접 담그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용기가 없어 선뜻 실행하지 못했었다.

요즘 햇살이 따사로운 날은 장독대로 달려가 항아리뚜껑을 연다. 산들바람이 불어와 사랑과 행복을 넣어주고 간다. 오늘은 벽면 한쪽에 걸려있는 초상화 속 시부모님의 미소가 정겹다. 그런가 하면 어머님의 장 담그는 날의 가쁜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커다란 항아리에 일 년 양식인 장 담그기는 정성과 사랑 그리고 고된 노동이 함께 담겨있다.

된장은 스스로 주변의 여러 미생물과 어울려 하나가 되기까지 자신의 희생과 아픔까지 감내한 후 곰삭아 깊은 맛이 나는 것이다. 내가 살아가는 방법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사랑을 품은 희생이 없다면 삶의 맛 또한 단백 함을 유지하기란 어렵다.

메주에 소금물이 스며들어 하나가 되듯 내 마음의 모난 모서리가 둥글게 되기까지 많은 아픔과 인내가 필요함을 느낀다. 가지 끝에 매달린 나뭇잎처럼 바람 부는 대로 휘둘리며 욕심의 웃자람이나 성급한 마음에 성숙하지 못한 자신을 대할 때가 많다. 그뿐인가 때로는 스치는 말 한마디에 평정심을 잃는 자신이 부끄러움으로 다가 오기도 한다.

이제는 식탁의 된장 맛처럼 오랜 기다림으로 숙성되고 곰삭아 어지간한 일에는 꿈적도 않는 속내를 꿈꾼다. 오늘도 볕이 좋아 나는 항아리 뚜껑을 열어 햇살과 사랑을 함께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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