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자 수필가

 
 

함께해서 행복합니다.’라는 현수막을 준비하여 요양원을 방문했다. (사)아이코리아 음성군지회 회원 30명은 여러 가지 놀이기구를 준비하였고 어르신들과 즐거운 시간을 갖기 위해 달려갔다. 풍선으로 예쁜 모양을 만들어 게임을 하고, 기구를 이용해 손, 발 마사지를 해드렸다. 함께 손뼉 치고 노래도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번 방문에는 특별한 손님도 초대되었다. 요양원 인근 어린이집에서 어린이 17명이 함께했다. 동요를 부르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어깨를 주물러 드리니 어르신들은 아이처럼 행복한 표정이다.

우리는 요양원 어르신들을 2년 전부터 매월 한번 씩 찾아뵙는다. 얼굴을 익히면서 손을 잡고 그분들의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소통이 이루어지고 행복한 듯 표정이 환해진다. 지금은 비록 비켜 갈 수 없는 노년으로 남의 도움 없이는 생활하기가 불편하지만,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편리함과 아름다운 사회는 이분들의 희생과 피땀으로 일궈놓은 산물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분기별로 관내 독거노인을 위해 약 250명분의 밑반찬 만들기, 경로식당 배식 봉사, 외국인며느리 친정엄마 되어주기, 요양원이나 복지시설 방문하기, 장학사업, 인형극을 통한 어린이 성교육 등 그 밖의 음성군에서 개최되는 크고 작은 행사에 참여한다. 그중 유독 내 마음이 달려가는 곳은 요양원 어르신들을 방문할 때다. 거동이 불편하신 그분들을 만날 때면 친정어머니 같고 어릴 적 할머니를 뵙는 것 같아 좋다.

누구나 성장하면서 한두 가지 아픈 기억을 간직한 채 살고 있다. 나는 엄마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첫돌이 지나고 헤어졌으니 엄마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할머니의 빈 젖가슴을 더듬으며 채워지지 않은 허기와 사랑을 갈구하며 성장했다. 어린 것을 키워 주시느라 할머니의 사랑과 숙모님의 희생도 뒤따랐다.

내가 어릴 적 잠자리에 들면 늘 자장가를 부르며 거친 손바닥으로 내 등을 쓰러 주시는 할머니의 시큼한 적삼 냄새에도 사랑이 묻어있었다. 그 냄새는 내 기억의 끈으로 다가와 터널에 갇힌 듯 캄캄한 시간이 이어질 때도 내게 견딜 힘이 되어주었다.

사춘기 무렵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숙모님 곁을 떠나 낯선 아버지 집으로 보내지면서 마음고생이 시작되었다. 막연히 엄마에 대해 그리움은 원망으로 변했고 유년의 방황을 부채질하기도 했다.

1984년 초봄 이산가족 찾기에 온 나라가 들썩일 때 나는 꿈에도 그리던 어머니를 27년 만에 만났다. 막혔던 물길이 터지듯 가슴에는 따뜻한 온기가 찾아왔다. 어머니도 나로 인해 생긴 오랜 지병이었던 천식도 씻은 듯이 나았다고 했다. 무엇보다 아들, 딸에게 외할머니가, 남편에게는 씨 암 닭을 잡아주는 장모님이 생겨 좋았다. 가끔은 꿈이 아닌가 하고 내 볼을 꼬집어도 볼 때도 있다. 요즘은 유년에 갖지 못했던 추억을 어머니와 함께 차곡차곡 만들어 쌓아가는 중이다. 한데 벌써 어머니는 서녘에 붉게 물던 황혼녘이 되셨다.

양로원 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날은 냉골의 방에 군불을 지핀 것 같은 훈훈함을 느낀다. 아마 그곳은 어머니와 할머니의 가슴을 가진 분들이 계시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날은 여지없이 전화기를 들어 어머니의 안부를 묻는다. 어머니의 목소리에 반가움이 묻어난다. 앞으로 주변인들과 온기를 주고받는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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