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순

 
 

스위스의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은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에 따르는 태도를 가리켜‘페르소나’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페르소나’는 '외적 인격' 또는 '가면을 쓴 인격'을 뜻한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본모습 보다는 남을 의식하며 행동한다. 주위에서 만나는 언제나 배려심 깊은‘한결같은’그 사람도 어쩌면 혼자만의 공간에서는 자신의 본 모습으로 돌아 갈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태도가 돌변한다는 말이 아니다. 사람은 다른 누군가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싶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내심과 노력이라는 감정으로 중무장한‘페르소나’가 필요하다. 그러나‘페르소나’를 자신의 본 모습과 동일시하는 함정에 빠진다면 곤란을 겪을 수도 있다.

얼마 전 홍상수 영화감독과 여배우 김민희의 불륜 설은 세상을 시끄럽게 했다. 영화감독에게 작품은 숨겨진 욕망을 표한해내는 예술이 되기도 한다. 홍상수의 영화에는 늘 남자와 여자가 등장하지만 이 둘이 잘 될 확률은 희박하다. 현실에서 극복할 수 없는 벽이 이들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작품에서는 영화감독의 직업이 자주 출현한다. 본인이 겪은 일을 영화화한다는 설이 나도는 것도 그래서다. 홍상수와 김민희의 사랑을 싹트게 한 작품은“지금은 맞고 그 때는 틀리다”이다. 이 작품에는 홍상수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페르소나’가 등장한다. 하지만 홍상수는 김민희라는 배우를 만나면서 자신의‘페르소나’의 함정에 빠지고 만다. 영화의 결말은 서로의 사랑에 아파하며 헤어진다. 그랬어야 했다. 하지만 홍상수는 자신의‘페르소나’가 이끄는 대로 영화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예전에 나는 소녀였다. 비가 오는 날은 우산도 필요치 않았다. 옷 위로 쏟아지는 빗방울들을 맞으면서도 친구들과 함께 웃어대며 좋아라 했다. 두려움도 없었다. 시시때때로 다가오는 자연의 모습은 그 모습 그대로 소녀에게로 흡수 되었다. 그러면서 소녀는 여자가 되었다. 여자는 남자를 만났다. 여자와 남자는 서로에게 많은 것을 양보했다. 생각해보면 여자보다 남자였던 그가 분명 더 많은 것을 참고 배려를 했다. 하지만 내면을 억압 할수록 서로를 갖고자 하는 욕망은 커져만 갔고, 결국 여자와 남자는 부부가 되었다. 그때, 남자의 아내는 어이없게도 그의 모든 것을 가졌다 생각했다.

남자는 남편이 되자 태도가 돌변하기 시작했다. 부드럽고 배려심 많던 모습은 오간 데 없이 순간순간 아내에게 매가 되어 몰아치곤 했다. 여자는 그동안 착각 속에 산 것이다. 결국 여자에게 보여주던 남자의 한없이 다정하고 멋진 모습은 그의 ‘페르소나’였다. 여자는 생각한다. 그리고 반문도 해 본다. 남자에게 보여주었던 그간의 행동들 또한 자신의‘페르소나’가 아니었냐고. 그렇다고 서로에게 왜 그랬냐고 원망을 할 일도 아니다. 그것은 서로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욕망이 가져 온 결과이므로.

그간 여자는 그 남자의 곁에서 삼십년 남짓의 세월을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표류하며 살았다. 그 세월들은 실망과 억울함과 미안함과 고마움과 편안함이라는 말들이 변하는 순간을 맛보는 시간이었다. 돌이켜 보건대 그것은 남편과 아내로서 서로의‘페르소나’를 인정하고 깨닫는 세월의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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